미공군 제8전투 비행단
     前 남도국 공보관
 가장 살기 좋은 곳 울진을 택하다

2000년 6월 퇴직 후,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며 노후를 보낼까를 결정해야만 했다.  사실 나는 지난 43년 간 군산에서 살아오면서 많은 정도 들었고, 또 그곳에 모든 기반을 다 이루어 놓았다. 

젊고 생기 넘치든 시절 이리저리 살아가면서 장만해 놓은 크고 작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늘려 있고, 가까운 친척 친구들이 또한 그곳에 살고 있다. 주한 미군과도 45년 간 함께 살아왔으며, 자산 이라고는 미군 상대로 하는 소규모 사업이나 번역 업무 같은 것이 적절하리라.

그런 일 계속하려면, 군산 보다는 미군이 많은 서울 용산이나 오산 기지 근처로 가서 해야 잘 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이제 그런 건 싫었다. 

한 일 년 동안 놀면서 이런 저런 구경도 하고 남들과 상의도 하면서 지내다가, 2001년 6월에는 친구들과 호주 시드니로 가서 열흘 간 골프 치며 여기 저기 놀다 왔다.  그 곳은 내가 원하는 노후 생활 할 곳은 아니라고는 생각되었다. 

또 1년 후 2002년 8월, 이번에는 집 사람 동반하고 캐나다 토론토의 딸 네 집에 가서 거처를 정하고, 두 달 여 간 벤쿠버, 몬트리올, 나이아가라, 미국 뉴욕 등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며 이런 저런 구경을 한 적도 있으나, 집 사람이 이곳도 싫단다. 

내 킨 김에 미국 시카고로 날라 가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는 큰 형수 와 여기 이주하여 살고 있는 세 조카들을 방문하여 20여 년 만의 상봉으로 혈연의 정을 나누며, 2 주간을 지내다 온 적도 있다. 

조카들의 “시카고에서 함께 살자” 는 간절한 애원도 마다하고 다시 토론토로 날라 와, 열흘 간 쉬다가 한국으로 귀국하여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지구촌 어디에서든 나와 집 사람이 노후에 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경북 울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니, 너무나도 뜻밖의 엉뚱한 결정에 온 집 안이 눈물바다가 된다. 

친구들 모임에서 이 사실을 설명하고 다 빠진다.  입장이 곤란한 사람들에게는 아예 얘기조차 않고 정든 집을 부동산에 내 놓으니 사흘 만에 임자가 나 얼른 계약을 체결하고, 열기가 식기 전에 짐 보따리 주섬주섬 챙겨 그 다음 날 오후에 울진으로 달려오니 밤 11시였다. 

고향을 떠난 지 45년 만에 살기 위하여 다시 울진으로 돌아오니 형님과 형수 씨 두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어 고마웠다.

속 모르는 친구들은, 영주권 따기 쉬운 미국에 가면 영어도 잘 하고, 친구도 많고, 대우도 잘 받으며 살 텐데, 왜 하필 한국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울진을 택해 가느냐는 비난도 받았으며, 캐나다의 밴쿠버나 토론토는 UN에서 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곳으로 선정되었는데, 왜 딸네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 그곳에 눌러 앉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느냐는 이야기도 여러 차례 들었다. 

서울이 그렇게 싫으면 중간쯤이고 처가가 있는 대전을 택하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소리도 있었지만, 나는 그 모든 제안을 마다하고 이곳 울진으로 돌아왔다.

울진을 택한 이유는; 나는 외국인이 싫었다.  지난 45년 간 그들과 좋든 나쁘든 함께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또 서울이나 큰 도시는 그 곳의 심한 공해가 나의 노후 생활을 두렵게 만들 것 같았다.  천식이라는 지병으로 내가 도시 공해와 싸우며 살아가기엔 역 부족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리라. 

울진을 택한 것은 실로 나에겐 파격적이었다. 
지난 45년 간 나는 여름휴가 때에 만 고향집을 잠간 다녀 갈 뿐이었지, 친구를 찾아 정을 나누거나 가깝게 사귀어 본 적도 없이 돌아가곤 했다. 

내가 돌아와 살아가는 지금의 울진은 어떤가?  울진의 겉모습은 내 느낌으로는 50 년 전과 조금도 변한 게 없는데, 사람의 모습은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조그마한 일로, 아주 조그마한 일들로, 주민들 끼리 싸우고 등지고 말 안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진면모를 보고 들을 때마다 울진의 밑바닥 인생을 잘 모르고 이곳을 택하여 돌아온 나와 집사람은 후회하기 시작한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다드니, 나는 집을 사서 수리를 하 든 그 날부터 고발당하고, 싫은 소릴 서로 주고받으며 살기 시작했다. 

집 뒤의 우리 문중 산 소나무 두어 그루를 그늘진다고 베었더니 앞 집 사람이 고발하여, 관공서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시말서 쓰고, 70 만원 벌금 까지 물은 적도 있었고, 또 그 집에서 우리 산에 허가도 없이 엄나무 심어 놓고 자기 나무라 주장하는 것을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구두로 나무랐더니, 남자가 여자에게 폭언, 폭행 했다고 허위 고발하여 경찰서에 두 번이나 불려 다닌 적도 있었다. 

또 부락 발전을 위해 동 장 일을 맡아 달라는 어른들의 권유에 잡아떼지 못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동네 리 장일을 맡아 헌신적으로 일 하든 2003년, 2004년 두해에 하필이면 수해 매미와 루사가 마을을 덮쳐 부락민들의 재산과 농경지에 피해를 입혔다.

수해 복구를 하느라 정신없이 땀 흘리고 봉사 했건만, 자기 밖에 모르는 몇 몇 동민이 공짜로 나오는 수해 구호물자를 왜 나는 안주느냐고 오해하고 시기하며 갈등만 안겨주어 스트레스가 쌓이는 바람에, 내가 편한 노후 생활 제대로 하려면 이런 어렵고 힘든 희생과 봉사의 일은 그만해야 겠다고 결심하고, 2년 임기의 리 장직을 2004년 말에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울진군청에서 나에게 2002년부터 2006년 까지 4년 간 매 년 8월부터 12월 까지,  경북도 명예관광 통역 안내원으로 임명해 주어, 일당을 받으며 집 앞 성류굴 관리사무소에 나가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을 했었다.

2006년 후엔 그 것도 불러 주지 않아 쉬면서 또 다른 일을 찾다가 금년 5월, 원어민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 울진군 남부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진군청에 문의한 결과, 대구 미 8군에서 자원한 미군 장병 과 그 가족들이 우리 울진의 후포, 평해, 매화, 근남 지역의 초, 중학교에서 영어 회화 공부를 하는데 도우미로 자원하여 봉사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 울진 지역의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내 고향 울진의 기둥이 될 청소년들의 튼튼하고 깨끗하고 일꾼으로 만드는 일에 미력이나마 보태보려고 울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상담사 교육을 열심히 받고 있다. 

금년 하반기쯤에는 아마 활동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오늘도 인터넷으로 “청소년상담사” 코너를 찾아 여기저기에서 많은 정보를 만나고 이에 관한 지식을 넓혀가고 있다.

그간 나의 하잘 것 없는 글을 사랑스런 마음으로 10회 동안 읽어 주신 독자, 팬, 선후배 및 친지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기초가 허술한 글 솜씨로 여러 독자들의 즐겨 읽는 신문에 감히 나의 하잘 것 없는 지난날 인생의 내용들을 기고하는 일이 자랑이기에 앞서 큰 부담으로 느껴졌으며,
또 오래 전 이야기긴 하지만 군사비밀을 함부로 이야기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나, 또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잘 못 다루다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나름대로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기고한 그 모든 내용은 진실을 토대로 엮어 졌다고 믿으며,

혹시라도 내용에 잘 못 되었거나 궁금한 것 있으면 하시라도 문의해 주시면 성의껏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간 졸작임에도 나무라지 않고 10회에 걸쳐 편집해 주신 울진 신문사와 또 편집이 잘 되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총무님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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