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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미래
어부가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을 치고 바닥을 훑어 고기를 몰았다. 그 바람에 온통 흙탕물이 됐다. 마을 사람 하나가 이를 보고 물을 못 마시게 더럽힌다고 나무랐다. 어부는 말했다. “물을 흐리지 않으면 난 굶어 죽고 말 거요.”
이솝이 살던 시대만 그런 게 아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해가 늘 일치할 순 없다.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건 득 보는 사람이 다수냐는 거다. 마을 사람 대다수가 냇물을 마셔야 한다면 어부가 물을 흐리는 건 잘못된 일이다. 여러 사람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 고집을 부린다면 그물을 빼앗아야 한다. 어부가 굶지 않도록 땅뙈기를 나눠줄 순 있어도 그게 아깝다고 여러 사람 먹을 물 흐리는 짓을 방관하거나 못 본 체해선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상류에 버티고 서서 물 흐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냇물 양쪽에서 서로 질세라 물 텀벙이다. 저만 옳다는 악다구니에 질린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서서 뭐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럴 때 쓰려고 뽑아놓은 백성의 대표들은 백성보다 어부 눈치 보며 제 몫 챙기기에 손발이 바쁘다. 흙탕물이 구정물로 변해도 물 밖으로 끄집어낼 의지도 능력도 없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뷰캐넌 교수의 정의가 한 치 어긋남이 없다. “정치인들은 선한 의도를 신봉하지만 행동은 자기 이익에 맞게 한다.” 입엔 늘 ‘국민’을 달고 다니지만 보이는 건 ‘나’와 ‘우리’의 이익뿐이다.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의 탄식에 또 한번 무릎을 친다. “심하도다. 붕당이 나라를 재앙에 빠트리나니. 구양수는 군자의 붕당은 많더라도 해가 없다 했지만 그 생각이 짧다. 군자와 군자가 붕당을 하고 소인과 소인이 붕당을 하는 것만 알았을 뿐, 군자가 각각 붕당을 해 서로 원수가 되고 소인이 그 뒤를 따른다는 걸 알지 못한 까닭이다.” 고기잡이 나간 선량들로 의사당은 불 켜질 날 없고 가엾은 이 나라 백성들은 흙탕물 한 사발 모래 가라앉길 기다리며 목이 타 들어간다.
무릎 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심각한 건 흙탕물 홍수를 이겨온 중산층의 벽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다. 온갖 풍상에도 제자리 지키며 사회의 버팀목이 되던 ‘침묵하는 다수’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벽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는 냇물을 거슬러 물 흐리는 치들과 한편이 되고 다른 일부는 힘에 부쳐 하류로 떠내려가고 만다. 흙탕물은 더욱 거칠어지고 그것을 지키는 벽은 점점 얇아져 간다.
1997년 51.5%였던 중산층이 2007년 43.7%까지 줄었다는 통계(소득수준 기준)가 있다. 대신 저소득층 비중은 19.9%에서 26.3%로 늘었다. 소득격차를 나타내는 소득 5분위 배율은 올 1분기에 8.68배로 2003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나타냈다. 중산층의 몰락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울프슨 지수 역시 2003년 카드대란 이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취업계수는 95년 국내총생산(GDP) 10억원당 43.7명이던 것이 2006년 30.6명으로 감소했다. 고용 없는 성장이 남의 일이 아니란 얘기다.
이런 구조에서 갈등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 정권이 국정 운영에 그토록 애먹는 것도 저소득층으로 떼밀린 중산층의 빈 공간으로 정책 지지기반이 약해진 탓이다. 살아남은 중산층들도 더 이상 물 흐리는 사람들을 나서 꾸짖을 여력이 없다.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경제가 어려워도 정치가 실종돼도 뚝심 있게 사회를 이끌어온 그들이다. 그들의 벽이 더 이상 얇아진다면 사회적 성장동력은 기대할 수 없다. 두터운 중간층 없이는 계층 갈등을 해소할 방법도 없다. 그 다음은? 19세기 미국의 선험론 철학자 오레스티스 브라운슨이 답을 말한다. “모든 전쟁 중에 가장 무서운 건 부자와 빈자의 전쟁이다. 그것은 아무리 늦춰도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 최악의 공포와 함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