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칼럼/ 초가삼간의 행복....70회

 

범상스님
범상스님

일 년 열두 달을 묘사하는 민요 <자진방아타령>에는 ‘사월이라 초파일’이라며, 부처님오심을 노래한다. 서양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문화현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란,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삶과 죽음)를 해결해 준다고 주장하며, 신앙하는 무리들에 의해 영위되는 의례를 동반한 문화현상’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각각 다른 이념의 종교를 일반화시킴으로서 사회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종교에 통달했다’가 아니라 ‘유불선에 통달했다’고 표현해 왔다. 이것은 ‘호리유차천지현격’ 즉, 시작의 미세한 차이가 궁극에 가서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진다는 사실로서 공부하는 사람의 분명한 자세를 나타낸다. 우리는 인간으로 통칭된다. 하지만 행위의 범위는 부모자식을 죽이는 폐륜에서부터 생면부지 남을 구하려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살신성인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다 같은 인간’이라는 일반화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

일체만물은 다름으로서 하나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래서 다름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전체를 알 수 없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궁극에서는 같다며 혹세무민의 유식쟁이들을 종종 본다. 자비란 일체존재는 동일한 값을 지닌 것으로 나와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는 우주존재의 통찰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음식과 내 생명의 경중을 따질 수 없듯..., 반면 사랑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계명을 근본으로 한다. 믿음에 대해서 신명기(13:7~11)에는 부모, 형제, 자식이라도 다른 신을 섬기면 엄단하라는 엄격한 명령이 따른다. 이처럼 자비는 존재의 관계성에 바탕을 두었다면, 사랑은 신에 대한 믿음을 담보로 한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장미라는 것이 있나니,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향기가 여전하듯 나의 가르침을 어떻게 부르든지 그것에는 변함이 없다’ 를 전제로 자신의 깨달음은 우주에 편만한 것이며,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여전하다. 누가 만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자신이 만든 것은 더욱 아니라고 천명한다. 우주에는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가 포함됨으로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지녔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그래서 깨달음은 신비한 능력을 얻는 게 아니다. 다만 우주유일의 자신과 자신을 마주하는 대상 전체를 통찰하는 것이다.

우주와 나의 존재방식을 “일체는 변한다.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로 정의하고 이 셋을 통찰하면, “고요한 평안의 행복에 다다른다”로 불교를 정의한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괴로움을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를 다음의 여덟 가지로 밝힌다. 생로병사 네 가지 괴로움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 ‘싫은 사람과의 만남’,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함’,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 등이다. 여덟 가지 사건은 절대적 존재나 실재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변하고 있는 우주운행에서 파생되는 현상일 뿐이다.

이 여덟 가지의 현상을 변화시키거나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번도 확인되거나, 그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래서 오직 자신이 ‘자신과 우주의 존재방식’을 깨달아 평온한 행복을 얻어야 한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 당시에도 신과 운명이 있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신과 운명에 있지 않는가?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신과 운명을 믿는 것은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인을 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린 것과 같지 않는가?’ 라고 물었고, 명쾌한 답이 없었다.

세계인들 90%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인들은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는 반면, 비종교인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개업고사, 등산객의 시산제 등으로 미루어 보면 나름의 종교를 영위한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해 종교의 일반화를 떠나 각 종교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더욱 절실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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