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종주 칼럼니스트
바람이 낮아지고 파도가 스스로의 호흡을 되찾을 즈음이면, 장현의 노래 「미련」이 다시 귀에 걸린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마음은 설명 없이 울진으로 향한다.
지명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숲이 함께 숨 쉬는 어떤 결이 먼저 다가온다. 장현의 목소리는 장소를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오래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불러낸다.
울진의 바다는 늘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파도를 품어왔다. 높지 않지만 끊임없는 파도는 소리를 남기지 않고도 흔적을 만든다. 금강송 숲은 요란한 소리를 거부한 채, 깊은 울림만을 키워왔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견딤을 배웠고, 말보다 침묵에 많은 것을 담았다. 그 축적된 시간의 결이 장현의 중저음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의 목소리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쉽게 닳지 않는다. 오래 들을수록 깊어진다.
소리의 고향은 지명이 아니라 축적이다. 귀가 먼저 길들여진 리듬, 몸이 앞서 기억하는 울림, 말이 생기기 전부터 쌓여 있던 침묵의 층위. 장현의 노래는 바로 그 층위 위에서 자란 소리다.
「미련」은 이별을 외치지 않는다. 슬픔을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끝났음을 알면서도 마음이 남아 있는 상태를 조용히 견딘다. 울부짖지 않고 남겨두는 태도, 그 태도 자체가 울진의 자연과 닮아 있다.
파도는 높아지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숲은 소리를 삼키며 깊이를 만든다. 장현의 노래는 그렇게 청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한 번 듣고 지나가는 노래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소리다.
그래서 어떤 목소리는 설명 없이도 바다를 불러오고, 어떤 노래는 가본 적 없는 숲을 기억하게 한다. 장현의 노래를 들으면 울진을 직접 찾은 적 없는 사람도 바다와 숲을 떠올린다. 이는 소리가 공간을 넘어 기억을 호출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에는 지역의 리듬과 정서가 보편적인 감정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번역의 힘이 바로 문화예술인의 역할이며, 지역이 인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울진은 세계유산을 품은 땅이다. 그러나 세계유산은 자연 그 자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간이 유산이라면, 그 공간을 살아낸 사람은 시간의 유산이다. 장현은 울진의 자연과 삶이 만들어낸 ‘소리의 유산’이다. 그의 노래는 기록되지 않은 지역의 정서를 가장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다. 문서로 남기기 어려운 감정, 말로 설명하기 힘든 태도가 그의 목소리 안에 살아 있다.
노래의 고향은 그 소리가 가장 오래 견뎌낸 곳, 사라지지 않고 남아 끝내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자리다. 이제 울진은 이 소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거창한 개발이 필요하지 않다. 장현의 노래와 울진의 파도 소리를 함께 담는 사운드 아카이브, 해안과 숲을 따라 그의 음악을 만나는 노래길, 작은 전시와 해설 프로그램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연을 ‘보는 관광’에서, 사람을 ‘기억하는 문화’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매화면 매화리에는 아직도 장현을 기억하는 고향 선후배가 살고 있고 친인척이 살고 있다. 그와 함께 기타를 치며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장현은 고향을 사랑했지만 결국에는 돌아오지 못하고 용인공원에 묻힌 장현. 이제 돌아오지 못하지만 그의 노래는 돌아오게 해야 한다. 매화리에 살고 있는 지인들도 장현의 노래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울진노래방에서 지인들과 함께 장현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싶다.
늦었지만, 우리가 장현의 노래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지역이 어떤 소리와 태도로 살아왔는지를 미래에 전하는 일이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을 때만 잊힌다. 울진이 장현의 노래를 품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목소리 안에 울진의 시간이 아직 살아 있고, 그 시간이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