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순 여사 3천만원 출연, 재정기반 갖춰

1974년 성지곡 수원지에서 창립 총회

1980년 이장길 회장 때 군민회 중흥

윤영익 군민회 발기인 및 총무 회고록

 

윤영익 전 재부군민회 총무
윤영익 전 재부군민회 총무

옛날에 타향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하였다. 그때는 경제사정과 교통이 불편해서 일 년에 설 또는 추석이나 고향을 방문했으니, 고향산천이나 고향 사람이 무척 그리웠던 것이다.

지금은 두세 시간이면 울진까지 갈 수 있지만, 1960년대에 울진을 가려면 새벽 4시에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고 자갈치에서 첫 차를 탄 후, 흙먼지를 쓰며 사고없이 긴 시간을 달려야 평해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부산에 울진 사람이 얼마나 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서로 인사하다가 고향이 울진이라고 하면, 일가친척을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무조건 소주잔을 기울였다.

1960년대 중반에 윤영익, 서광일 등 울진중고 출신들이 ‘연호친목회’ 모임을 하고 있었고, 한상숙, 김병찬 등 평해중 출신들이 모임을 하면서, 서로 울진군 전체의 청년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던 차, 연호친목회 월례회 때, 평해 출신의 대연여중 교사였던 손병우 선생이 연호친목회에 찾아와서, 재부울진군 청년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1972. 02. 재부 울진군 ‘청우회’ 를 조직하였다.

초대 회장에는 황종대, 총무는 이천우로 선출하고, 회원 간의 상부상조와 친목을 도모하면서 고향을 위한 사업을 연구하다가, 울진군 내 초`중학교 대항 배구대회 및 축구대회를 주최하기로 하여, 그 후 10년간 매년 개최하였다.

이 행사 때는 울진군청, 경찰서, 교육청에서 적극 후원하였고, 울진경찰서에서는 영덕 경계까지 경찰차가 나와 일행들을 선도해 주었고, 교육청에서는 각 학교에 참여 공문을 보내고 행사장에는 교육장이 참석하여 축사도 해 주었다.

이 사업이 중단된 것은 박두영 회장 때, 죽변중학교 운동장에서 배구 및 축구 결승전을 마치고 시상식 후 회식자리에서, 울진교육장이 군 자체 행사가 많아서 앞으로 청우회 행사에 후원하기 곤란하다 하여서 중단되었다.

대회 때마다 참가하는 선수와 임원들의 식대와 여비도 전액 청우회에서 부담하였으며, 울진군 내 전 학교에 배구 및 축구공을 선물하였고, 회원 개인별로는 자기 연고 학교에 많은 물적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 사업으로 그 당시 울진에서 유명 배구 선수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업을 하면서 청우회는 재부울진군민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장년층인 장성업, 손순경, 박진규, 황석조 등 백암친목회 회원들에게 설명을 드려 재부울진군민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1974. 07. 16. 군민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 회의를 박하윤 (당시 대동병원장) 임시의장을 하였고, 1974. 09.21. 부산진구 초읍동 성지곡 수원지에서 창립총회를 하였으며, 초대 회장에는 근남면 출신 장성업 동영목재 사장님이 선출되었다. 선출된 장성업 회장님과 윤성준(우체국장) 부회장은 기금 조성을 위하여 고향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노력한 결과, 많은 기금이 확보되어 군민회 운영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77. 05. 01. 정기총회에서 김유석 씨가 회장 하겠다 하고, 김성환 씨가 부회장 하겠다 하여 선출되었는 데, 이 두 사람이 총회나 이사회 결의도 없이 1977년 9월에 울진에 가서 군내 노인들을 모셔놓고, 회장의 친구인 죽변 출신의 오준석 국회의원을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성대히 베풀었는 데, 그 결과 군민회 기금은 바닥이 나고 이십여만원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 당시 총무였던 분은 울진에 가서 제 10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우리 군민회는 순수 고향 사람들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 모임인데 이런 사건이 발생한 후, 초창기 기금 조성에 노력했던 분들은 분노를 느끼고, 그 외 회원들도 실망하여 모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군민회가 해체 단계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초창기 발기인들이 다시 모여 창성 해운 주식회사 이재철 사장님을 설득해서 회장으로 모시기로 하고, 1978. 06. 04. 제4회 정기총회에서 이재철 사장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그때 필자도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

회계장부를 인수인계할 때 부채 부분은 김유석 전 회장이 변제하였으나, 군민회 기금은 제로 상태이고, 이재철 회장이 출연한 금 오십만원으로 새로 시작하여 회장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들의 불신은 여전하여 성원 미달로 이사회는 유회가 되니, 의결기구의 마비로 이름뿐인 군민회였다.

회장과 총무가 재생 방법을 연구한 결과, 젊은 층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고 지역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들 신치상, 박규석, 남주종 등 각 면에서 3~4명씩 선별하여 40여 명으로 신우회라는 친목회를 조직하였고, 신우회원 전원을 군민회 이사로 추대하여 신우회원들만 참석하여도 성원이 되어 이사회를 열 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80. 05. 18. 온천동 금강공원 식물원에서 제6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는데, 8개면 2개 출장소에서 차출된 10명의 대의원들이 회장 선출을 한 결과, 온정면 출신 아성산업사 이장길 사장님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장길 회장님은 와해 된 군민회의 활성화를 위하여, 열정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군민회 참여를 설득하고 이사회 및 각종 모임 때는 회비 없이 참석하기만을 애원하며, 식대 등 모든 경비는 회장 사비로 지출하면서 기금을 모으며, 진심을 보이니 차츰 회원들이 참여를 하였다.

또 군민회보를 발행하면서 각 면 단위와 학교 단위의 모임들을 찾아다니며 연락처를 소개하고, 이 회보를 통해 서로 연락이 되고 총회 때는 서로서로 연락을 하여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많은 회원이 참여하여 군민회가 활성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장길 회장님은 1986.05 임기 만료 후 30여 년 간 군민회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니, 재부울진군민회의 최고 공로자라 할 수 있다.

1974년 군민회 창립을 위해 발기인들이 여러 번 모임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서면 로터리에서 일식집을 운영하시던 손순경 사장님이 장소와 식사 및 음료수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1994. 04. 재부울진군민회장학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는 고 손순경 사장님의 부인이신, 조정순 여사님이 이장길 고문님을 통하여 거금 3천만 원을 출연하셔서, 이를 계기로 회원 및 각 분야의 울진 학회 회칙 및 장학금 지급 세칙을 만들었다.

장학기금은 개인이 절대로 유용 못하도록 장치가 되어있고, 장학금 지급은 보통 자산 번위 내에서 지급하고, 기본자산은 계속 쌓여 2억여 원에 가까우니 재부울진군민회는 영원히 발전하리라 믿는다.

필자 자신을 돌이켜보면 재부 울진중고 동창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를 하고 청우회 총무, 군민회 발기인 및 총무, 장학회 초대 사무국장을 하였던 세월이 보람보다는 바보로서 부끄럽기 그지 없으나, 숱한 좋은 일 궂은일만 있으면 제일 먼저 총무를 찾았고, 그때마다 사심없이 성심껏 도와주었던 일들이 보람이고,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윤 총무 아닌교?” 하며, 반가워해 주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끝으로 재부울진군민회 또는 회원들 개인이 울진군 행사 및 각 면 단위 행사 때마다 수없이 많은 협조를 했지만, 울진군 내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울진읍 월성공원 충혼탑 건립시 찬조자 명단에 우리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울진군민회관 건립 후 입구에도 새겨져있고, 원남면 3.1 독립운동 기념탑에도 우리 회원들의 명단이 새겨져있다.

그 외 울진군 주최 성류문화제, 평해단오제 등 협조를 하였고, 근남면 소재 제동중학교 졸업식 때는 5년간 울진에 올라 가서 성적 1,2,3등에게 고급 손목시계를 직접 시상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형편상 군민회에 참여하지 않아서 회원들 기억에서 사라졌고, 이재 내 나이 팔십을 넘어 인생 종점에 왔는데, 잊힌 군민회 초창기 역사를 이렇게나마 남기는 바다.

 

 

/윤영익 전 재부군민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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