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장군숭모회 활동에 즈음하여
울진논단/ 전병식 발행인
울진의 역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바닷바람과 험준한 산세를 견디며 곧게 뻗은 금강송처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한 영웅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우리 군민들의 마음속에서 그 이름은 너무나 오래도록 묻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국가 위난 속에서 호남의 곡창을 지켜내 나라의 운명을 바꾼 영웅, 바로 울진군 기성면 (당시 평해군) 사동리에서 태어나, 울진의 정기를 품고 자란 충렬공 정담(鄭湛) 장군입니다. 이제 우리는 타 지역의 연고 주장에 앞서, 그를 울진의 독보적인 정신적 지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영덕군 등의 연고를 언급하기도 하나, 장군의 생애 기록은 그의 본향, 울진의 아들임이 명확합니다. 장군은 1548년(명종 3년) 기성면 사동리에서 야성 정씨 가문의 후예로, 해월 황여일의 외삼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곳 울진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기상을 키웠고, 1571년(21세) 무렵 혼인 후 영해로 분가하기 전까지 그의 삶의 뿌리는 줄곧 울진이었습니다. 1583년(36세) 무과에 급제하여 공직에 나아간 장군은 울진의 흙과 바람이 빚어낸 늠름한 기상이었습니다.
장군의 충절은 당대 최고의 인물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백사 이항복은 장군의 시장(諡狀)에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을 만한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데, 정담은 참으로 그 죽을 곳을 얻었도다”라며, 고결한 죽음을 찬탄했습니다. 또한 도원수 권율 장군은 웅치전투의 처절한 사투에 대해 “정담의 충절은 고금에 드문 것이며, 그가 보여준 용맹은 군인들의 본보기이자 호남을 구한 실질적인 힘이었다.”고 격찬하며, 조정에서 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역사학계는 웅치전투를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전환점'으로 평가합니다. 만약 장군이 1천여 군사로 1만 대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전라도가 함락되어 이순신 장군의 수군 또한 보급로를 잃었을 것입니다.
적군조차 그의 용맹에 감동하여 朝鮮國 忠肝義士 鄭湛之墓 조선국 충간의사 정담지묘 라고 쓴 푯말을 세웠을 만큼 장군의 위상은 독보적입니다. 그 내용은
"朝鮮有忠臣鄭湛 : 조선에 충신 정담이 있었으니 臨陣奮戰,死而不屈 : 전장에서 분전하다 죽어도 굴하지 않았다 吾雖敵軍,亦敬其忠義 : 내가 비록 적군이나 그 충의는 존경한다 故立此碑以示後人 : 그러므로 이 비를 세워 후인에게 보인다" 입니다.
. 이 위대한 서사의 시작점이 바로 울진군 기성면이라는 사실을 우리 군민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자부심입니다.
최근 울진에서 '정담장군 정신계승·보존회'가 발족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원자력수소 국가산단 등 대형 사업을 앞둔 울진에, '울진다움'의 뿌리를 찾는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생가 터 정비와 기념관 건립, '정담 순례길' 등을 조성하여 '울진이 배출한 정담'의 가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5만 군민의 가슴에 불을 지펴야 합니다. 정담 장군은 430년 전 고독한 싸움을 이겨내며 울진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보존회 활동에 한뜻으로 힘을 실어 주십시오.
장군의 삶이 울진의 새로운 백 년을 이끄는 동력이 될 때, 우리 울진은 비로소 대한민국에서 가장 빛나는 '정신의 고향'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울진의 아들, 정담 장군의 기개로, 위대한 울진의 내일을 열어 가도록 합시다!
/전병식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