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박호길 원로 장로
지난해 어느 겨울, 잠을 자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다. 티끌 한 점 없이 너무도 맑디맑고 개운한, 눈 온 날 아침을 맞는다. 반가움에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지나간 눈길을 걷는다. 걸을 때마다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가 옛 생각을 불러온다.
내 어릴 적에는 큰 눈이 많이도 내렸다. 먼저 온 눈 위에 새로 온 눈이 쌓여 녹지도 않았고, 눈 위로 걸어도 눈 속에 발이 빠지지 않았다.
더욱이 산길은 눈이 많아 푹신하기도 하고 남겨진 발자국들은 눈 위에서는 미끄러울까 봐 조심하고, 질척거린 눈에서는 젖지 않으려 조심하는 발자국임이 역력히 보인다.
또한 내리막길은 쪼그리고 앉아 발에 힘을 주니 쭉쭉 잘도 내려간다. 누구 보는 사람이 없으니 신나게 미끄럼 타고 내려오니 재밌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돌아오는 길에 눈 위를 살금살금 걸으며 신기해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눈이 오던 그날에 체험했던 다양한 추억은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당시 보자기 가방을 벗어 밑바닥으로 눈을 살짝 밀어내고, 더럽혀지지 않은 속 눈을 손으로 한 움큼 쥐고 입으로 찍어 먹으면, 혀끝에 닿는 촉감이 요즘 아이스크림같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눈 위에 벌렁 누워 누구의 몸 자욱이 더 큰 지 내기를 하며 웃음보가 터지고, 깔깔거리는 우리들 머리 위로 나무에 얹혔던 눈이 쏟아졌다. 눈 폭탄을 맞아도 좋아서 펄쩍 뛰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얀 입김으로 꽁꽁 얼어도 그때는 추운 줄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감나무, 밤나무 숲길에서 같이 놀던 그리운 친구들, 이제는 어릴 적 추억이 기억 저편으로 아득히 멀어져 간다.
그 옛날에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동네 어른, 아이 모여서 양동이, 세숫대야를 들고나와 눈 치우는 일은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눈이 귀한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더구나 계절은 순환하며 다시 돌아오고 있는데, 나이 들어 주거 공간이 바뀌면서 눈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눈 오는 창밖을, 여유를 갖고 맘 편히 바라본다. 아파트란 주거 공간은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빗자루 들고 나설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눈이 내렸다. 그 귀한 눈을 밟다 보니 옛 추억 속에 잠들어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알싸한 공기가 매운맛으로 오락가락하는 내 정체성을 나무라듯 얼굴에 와 부딪힌다. 밤사이 하얀 눈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조용히 덮어 주었다.
교회 원로장로 박호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