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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海月)선생 일대기 난중일기

작성자
향토지킴이
등록일
2007-07-12 22:47:49
조회수
8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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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헌9.JPG (913625 Byte)
○해월(海月)선생 일대기 난중일기
해월(海月) 선생은 조선 중기[1556(병진)∼1622(임술), 명종 11∼광해 14]의 문신으로, 휘(諱)가 여일(汝一)이며, 자(字)가 회원(會元),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또한 호가 처음에는 하담(霞潭), 해월(海月), 매월(梅月)이며, 후에는 만귀(晩歸)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사동리(沙銅里) 생가의 연원(淵源)을 말한다면,
황씨(黃氏)의 시조가 되시는 락(洛)이 중국의 강하(江夏)에서 우리 나라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의 월송정 북쪽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다가, 충절공(忠節公) 황서(黃瑞)가 군(郡)의 북쪽에 있는 정명리(正明里)로 이주(移住)하여 살아왔었다.
그런데 해월(海月) 선생의 아버지 되시는 창주공(滄州公)이, 사동리(沙銅里)의 사직(司直)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여식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사동리에 터를 마련하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명종(明宗) 11년(1556: 丙辰年) 10월 21일 병오일 사시에 사동리(沙銅里: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2세 때부터 풍골이 뛰어나, 사람들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비범한 아이라고 하였으며, 5세 때부터 비로소 독서를 시작하였다.
8세 때에는 선생은 사동리 집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정명리(正明里)에 계신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다.
해월(海月) 선생은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외우고 그 이치를 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는 대해(大海) 선생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아버지인 창주공(滄州公)은 '이 아이가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형제들인,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과 그의 형이 되는 군수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선생이 찾아와서, 극찬을 하며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해월(海月) 선생의 집안은 워낙에 가난하여 해월(海月) 선생의 어머니는, 10여 리씩 떨어진 대해(大海) 선생의 집으로 어린 아들이 매일 수업 받으러 다니는데, 밥을 해서 먹여 보내지 못하고 조석으로 멀건 죽을 먹여 보내니 매우 가슴 아파하며, 사흘에 하루라도 진하게 쑨 죽이라도 먹여 보냈으면 하며,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1569(선조 2년, 己巳)년 선생 14세 때에, 처음으로 간성시(杆城試) 진사시(進士試)에 진주죽서루(眞珠竹西樓)에 대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그 당시 강릉 부사였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서 관청에 초대하였으며, 그를 칭찬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1572(선조 8, 乙亥)년 5월, 나이 20세 때에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의 여식과 혼인을 하였다.
또한 가을에는 당시의 경상도 감사가, 안동부(安東府)에 와서 백일장을 열었다.
이때 선생은 동상(東床)에 있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어찌하여 시험장에 나가지 않느냐고 하자, 하는 수없이 해월(海月) 선생은 시험장에 입장하였던 것이다.
다른 과거 시험 보는 선비들은 붓을 들어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선생은 코를 골며 그 옆에서 잠을 자다, 해가 기울어 시험장이 파할 무렵에서야 앞의 병풍이 쳐 있는 곳으로 나아가, 단번에 붓을 들어 쓰고는 그대로 제출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 글이 바로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에 있는, 치술령부(○述嶺賦)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이 향해진사시(鄕解進士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며, 당시 시험관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생각하였고, 그의 이러한 일이 크게 소문이 났었던 것이다.
이때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였으며, 그 때 그가 남긴 치술령부(○述嶺賦)는 잘 알려진 소문난 글인 것이다.
1576(선조 9, 丙子)년 2월에 진사복시에서 3등을 하였으며, 7월에는 구담부(龜潭賦)를 썼다. 1577(선조 10, 丁丑)년 비로소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성균관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일대(一代)를 구가(驅駕)하였다고 한다.
1585(선조 18, 乙酉)년 봄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옥계서당(玉溪書堂)을 찾아 배(拜)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16일에 별시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예문관검열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 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1586(선조 19, 丙戌)년 정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동 예안(宣城)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교정과 편집을 보았으며, 10월에는 사가호당(賜暇湖堂)에 들어갔던 것이다. (선례로 보아 7품 이하의 벼슬로는 처음이라고 함)
1587(선조 20,丁亥)년 9월에 예문관 대교가 되었으며, 1588(선조 21, 戊子)년 정월에 임금이 불러 편전에서 야간강의를 여러 차례 했으며, 이 때에는 선비들이 서로 의심하고 서로가 배반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스러웠는데, 류성룡(柳成龍) 선생도 오랫동안 수습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 때 해월(海月) 선생을 불러서는, 어찌하면 화목하게 분란없이 안정케 할 수가 있을까 하며 해월(海月) 선생의 의견을 듣고서, 류성룡(柳成龍) 선생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4월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는데, 현판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약포(藥圃) 정탁(鄭琢),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선생 등등 수많은 인사들이 찬양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또한 7월에는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며,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내려갔었다. 1589(선조 22, 己丑)년 8월에 선조 임금이 불러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여러 차례 야간강의를 하였다.
신묘(辛卯)일 이 날은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병사(兵事)에 대하여 논했다.
이 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려는 조짐이 있어,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들였는데, 이 때 정언신(鄭彦信),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을 만나 보았다.
11월에는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는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 중론이 다 왜국에 사신을 보내자는데로 기울어지자, 선생 홀로 불가함을 조목조목 들어서 반대하여 말하기를,
「양국이 국교가 열리어도 난은 일어날 것이며, 열리지 않아도 난은 일어날 것인데, 차라리 국교를 끊고서 난에 대비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抗言曰 通亦發 不通亦發 莫如不通之爲少自取也)」 라고 하였다.
그 때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그를 가리켜, 동해의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시를 지어주며 격려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동해유로연(東海有魯連) 기인역항절(其人亦抗節)
거세욕종진(擧世欲宗秦) 이독대주일(爾獨戴周日)
담소각삼군(談笑却三軍) 기기재촌설(其機在寸舌)
아유일편심(我有一片心) 천추여군설(千秋與君說)
동해(東海: 조선)에도 노중련(魯仲連)이 있는데,
그 사람 또한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는(抗節) 사람이로다.
온세상이 다 진(秦)나라를 (황제의 나라라고) 높이려 하였으며,
그대 홀로(해월 선생) 일본과 친하는 것을 탄식하며(戴周日),
담소(談笑)하며 삼군(三軍: 대군)을 물리치는데,
그 기지가 한치의 혀끝(寸舌)에 있구나.
나 또한 한 조각 붉은 마음 있어,
천추(千秋)에 그대의 뜻(君說)과 함께 하노라.

노중련(魯仲連)은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으로, 기발하고도 웅대한 책략(策略)을 잘 구사하였으나, 고상한 절개를 지닌 분으로 세속을 초탈하여 전혀 벼슬할 뜻이 없는 분이었다.
그가 일찍이 조(趙)나라를 두루 유람할 때, 마침 진(秦)나라 왕은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조나라 군사 약 40만여(萬餘) 명을 전멸시키고, 동쪽으로 추격하여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에워싸니 조(趙)나라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으나, 제후국들은 진(秦)이 두려워 감히 구원군을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위(魏)나라 왕이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조(趙)나라를 구원케 하였으나, 역시 진(秦)나라의 군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탕음(蕩陰: 河南省)에 머물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위(魏) 왕은 객장군(客將軍: 타국 출신의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시켜, 몰래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들어가 조(趙)나라 왕의 숙부인 평원군(平原君)을 통해 조(趙) 왕에게 이렇게 건의하게 했다.
「진(秦)나라는 예전의 제(齊)나라와 세력을 다투어 제왕(帝)을 칭하다가 얼마 뒤에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제(齊)나라는 점점 쇠약해지고 이제는 진(秦)나라만이 우뚝 강대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진(秦)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한 것은 반드시 한단(邯鄲)을 차지하고픈 욕심에서가 아니라 다시 제왕(帝)의 칭호를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니 만약 조(趙)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을 높여 제왕(帝)이라고 칭한다면 진(秦)왕은 기뻐서 철수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 노중련(魯仲連)은 만나기를 꺼려하는 신원연(新垣衍)을 만나 말하기를,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노예처럼 다루는 진(秦) 왕이 만일 제멋대로 제왕(帝)이 되어 그릇된 정치를 천하에 편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습니다. 진(秦) 왕의 백성이 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진(秦) 왕이 제왕(帝)이라 칭하게 되었을 경우 생기는 해로움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를,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주문왕(周文王)이 모두 주(紂)왕의 삼공(三公)이었는데, 구후(九侯)가 미인인 그의 딸을 주(紂)왕에게 바치자 주(紂)왕은 그녀가 못생겼다고 하여 구후(九侯)를 소금에 절여 죽이자, 악후(鄂侯)가 이를 만류하니 그를 또한 포를 떠서 죽이고, 이 소식을 들은 주(周) 문왕(文王)이 탄식을 하자 그를 유리(?里)에 있는 감옥에 100일이나 가두었다가 그를 죽이려한 역사적인 사실등등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하고, 결국에는 신연원(新垣衍) 본인에게도 해가 미치게 될 것임을 말하자, 이에 신원연(新垣衍)은 그제서야 일어나 절하고서 사과하였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장군은 곧 군사를 50여리나 물렸고, 또한 위(魏) 나라의 공자(公子: 信陵君) 무기(無忌)가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명(君命)이라 속이고 위(魏)나라 장수 진비(晉鄙)의 군대를 탈취하여,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므로 진(秦)나라 군대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던 것이다.
이에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봉작(封爵)을 세 번씩이나 주고자 했으나, 노중련(魯仲連)은 끝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주연을 열어 천금(千金)을 바치며 장수(長壽)를 축원하니 노중련(魯仲連)은 웃으며, 「천하의 선비가 귀한 존재로 불리워 지는 것은 남을 위해 우환을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주며 근심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는 까닭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선비도 장사꾼의 그것과 다를바가 없지요」 라며 거절했다.
평원군(平原君)과 작별하고 떠난 후 평생토록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 후 이십 여년이 지나 연(燕)나라의 장군이 제(齊)나라의 요성(聊城: 山東省)을 점령했는데, 요성의 어떤 사람이 연(燕)나라 왕에게 연나라 장군을 참언(讒言)했다. 이에 참소(讒訴)를 당한 연(燕)나라 장수가 주살될 것을 두려워 요성(聊城: 산동성)에서 농성한채 감히 연(燕)나라로 귀국도 못하고 굳게 지키니,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일년 이상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때 노중련(魯仲連)이 화복(禍福)을 논한 긴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燕)나라 장군에게 보냈다.
연(燕)나라 장군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면서 갈등으로 밤낮을 지새다가, 결국 탄식하다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요성(聊城)안은 혼란해졌고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은 마침내 요성(聊城)을 함락시켰다. 전단(田單)은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魯仲連)의 공적을 아뢰니, 제(齊)나라 왕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벼슬을 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노중련(魯仲連)은 바닷가로 몸을 피해 달아나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를 누리는 몸이 되어 남에게 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세상을 가볍게 보고 내마음 내키는대로 살아가리라.」
1590(선조 23, 庚寅)년 5월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다.
선생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하루는 그의 집을 방문하니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무슨 글을 쓰고 있다가 선생을 보고는 그 책을 싸서 감추자, 선생이 정색을 하고 무슨 일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감추어야만 하느냐고 하자, 임공(林公) 역시 해월(海月) 선생이 크게 절조가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그 책 표지의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이었다.
그 때 선생은 그 책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붓을 들어 발문을 써서 주었으며, 그에 대한 발문과 시도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있다.
10월에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인 병마절도사 원(垣)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또한 선생이 손수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범준의 심잠(范浚心箴)을 써주면서 마음을 깊이 경계하기 위하여 큰아들인 중윤(中允)에게 주어 항상 외우게 하였다고 한다.
1591(선조 24, 新卯)년 12월 선조 임금으로부터 예문관 봉교로 다시 부름을 받고, 대학(大學)등 여러 서적을 하사 받았다.
1592(선조 25, 壬辰)년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4월에는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들이 강원도를 지나 함흥에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갑옷을 버리고, 지방 수령들은 북으로 달아나는 상황에서,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있던 해월(海月) 선생이, 함경 감사 류영립(柳永立)에게 '함흥은 많은 군사들이 지키고 둘러싸여 있는 근본이 되는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철령에 있는 군대가 뒤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의지할 수 없게되어 실패하는 경우, 안변이북 함흥까지 군대가 물러나게 된다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병마(兵馬)를 미리 조련하고, 성을 굳게 지켜서, 남쪽 군을 지원하여 적으로 하여금 철령을 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가? ' 라는 서신을 보내 권유하였다.
그러나 류영립(柳永立)은 끝끝내 따르지 않았다. 급기야 적이 철령을 넘으니 함경도는 이미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류영립(柳永立)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대신 칠계(漆溪) 윤탁연(尹卓然)이 함경 감사가 되었다. 병풍(屛風) 고개에 있던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도 도망하여 난대(鸞臺)로 들어가고, 토병(土兵)이 난을 일으키니, 적이 이르기도 전에 창고는 어지럽게 흩어지고 텅비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해월(海月) 선생의 말대로 된 연후에야, 류영립(柳永立)은 후회하고 탄복을 했다 한다. 또한 회령부(會嶺府)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진)과 순화군(順和君) 보(보)와 이들을 배행(陪行)한 대신 및 지방 수령 등, 수십인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투항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월(海月) 선생은, 천지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국경인(鞠景仁)의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창의사(倡義士) 이성임(李聖任)과 만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게 되어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기회를 따라 계책을 강구하였다.
회령(會嶺)의 유생(儒生) 신세준(申世俊), 오응태(吳應台), 나정언(羅廷彦), 임순(林恂)으로 하여금 장사들을 규합케 하여, 경성(鏡城)을 지키는 회령사람들을 은밀히 타일러, 명나라 군사들이 왜적들을 다 멸한 다음에 괴수들을 토벌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국경인(鞠景仁), 함연수(咸連守) 등을 일시에 잡아 참살(斬殺)하였다.
또한 함흥토적(咸興土賊) 진대유(陣大猷)와 그의 아들인 계수(桂樹) 부자가 왜적에게 투항해서 백성들을 해치는 행패가 심했다. 이에 대유(大猷)와 친분이 있는 한덕원(韓德遠), 덕구(德久) 형제들을 통하여 글을 보내, 대유(大猷)에게 화복(禍福)을 늘어 놓으며 꾸짖고 타일렀으나 명령을 듣지 않자, 김수준(金秀俊), 최찬(崔贊) 등을 보내 진대유(陣大猷) 부자를 포박하여 넘겼다.
이보다 앞서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이 진대유(陣大猷)의 아들인 계수(桂樹)를 아병(牙兵)으로 삼아서 데리고 다녔다.
해월(海月) 선생이 '이 사람은 불순한 기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까이 두느냐' 고 충고하였으나, 박순남(朴順男)은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결과가 해월(海月) 선생의 말처럼 되자,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선견에 탄복했다 한다.
1593(선조 26, 癸巳)년 정월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부임해 갔으며, 형조정랑이 되었다.
6월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594(선조 27, 甲午)년에 다시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되었으며, 3월에 명나라 장수(將帥) 천총(千摠) 이영춘(李榮春)과 화전(火戰)의 비방(秘方)을 논하다가, 명나라의 화전(火戰) 사용법이 매우 뛰어나자, 선생이 그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간청하여서 허락받았다.
선생은 화전(火戰) 비법(秘法)을 기록하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보내고, 또한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방어한 일들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문장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고, 병법 또한 뛰어났다.
9월에는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이 선조에게 청하기를, 병영(兵營)에는 한순간에 일이 만 가지로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해월(海月)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주청하여, 불가피하게 권율(權慄)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진주(晋州)에서 권율(權慄) 장군의 병영(兵營)에 있을 때, 후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백의종군 하면서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이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함께 이야기하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수전요해(水戰要害: 지세가 험조(險阻)하여 지키기에 편하고 공격하기 힘든 곳)를 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정왜록(征倭錄)에 실려 있는 것이다.
1596(선조 29, 丙申)년 5월에 선략장군행세자익위사사어(宣略將軍行世子翊衛司司禦)를 제수받았다. 1597(선조 30, 丁酉)년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에 올랐으며, 12월에는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제독(提督) 마귀(麻貴), 그리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함께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다.
1598(선조 31, 戊戌)년 9월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이 때에 명나라의 사신인 찬획주사(贊획主事)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나라의 안위가 위급함에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을 하였겠는가?
크게 고심한 끝에, 그 당시 문장으로 가장 총망받는 사람을 가려 뽑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에, 정사(正使)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 (우의정)이, 부사(副使)로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 (이조판서)이, 서장관(書狀官)으로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해월(海月) 선생이 뽑히게 되어, 10월 21(癸酉)일에 서울 서소문 모화관(慕華館)을 출발하게 되었다.
11월 10일 아침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으며, 12월 6(丙辰)일 압록강을 건넜다. 1599(선조 32, 己亥)년 1월 23(甲辰)일 비로소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황성(皇城) 동문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25(乙亥)일 병부(兵部)에서 보내온 공문서인 자문(咨文)에는, 우리나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대책을 마련 중에, 뒷일을 해월(海月) 선생이 맡아 수습하여 마침내는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사(上使)였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같이 갔던 사신일행(使臣一行)들과 어려웠던 상황에 대하여 주고받은 이야기를, 백사(白沙) 선생 문집(文集) 23권에 밝혀 놓았는데, 해월(海月) 선생이 이 일의 맹주(盟主: 동맹의 주재자)라 하였다.
그 당시 해월(海月) 선생은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가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해월(海月) 선생은 우리나라의 입장을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혼자 명나라의 수많은 조정 관리들과 접촉하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만나서 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자세히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2권에 기록하여 남겨 두었다.
사실 해월(海月) 선생은 명나라 조정의 여러 관청을 다니면서, 진정서(陳情書)를 전달하고 우리나라의 무고(誣告)를 진설(陳說)하고, 통변(痛辨)하자, 각로(閣老: 재상)와 고위관리(高位官吏)들은, 그의 언변과 논술(辭語)이 분명하고 예절바른 태도에 모두들 감탄하고는, 다투어 서로 차와 술을 대접하며 나라의 치욕을 벗겨 줄 테니, 공(公)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의 관상가(觀相家)가 조선(朝鮮)의 사신 일행 중 해월(海月) 선생을 가리키며,
『時相者來 使行 指先生 曰黃書狀生於東國 稟得萬里氣像甚可異也. 在座人曰書狀生於東海 世居小國 何以稟得萬里氣也. 相者曰信不誣矣. 稟生東海之氣書狀之量 河海弘量矣 ○○稱歎』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지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라고 하자, 함께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해(東海)에서 태어나 대대로 소국(小國)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상가(相者)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동해(東海)의 기(氣)를 받고 태어난 서장관(書狀官)의 도량(度量)은 하해(河海)와 같은 분입니다.' 라며 크게 탄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에 따른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에 전하는 일화가 있다. 그 당시, 명(明)의 신종(神宗) 황제도 해월(海月) 선생에게 '조선(朝鮮)은 삼천리(三千里) 강토(疆土)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서 명(明)을 치려 하느냐?' 라고 물었다 한다.
만일 여기서 바로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머뭇거린다면 모든 일은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朝鮮)이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찾겠다는 오해로 인하여 명(明)의 황제앞에 해명(解明)키 위해 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하였다.
'예 신(臣)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絶妙)하고 적절(適切)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종(神宗) 황제는 무릎을 치면서, '조선(朝鮮)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여일(汝一)」 이라는 이름이 「너 하나밖에 없다」 는 뜻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해결하고 귀국하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동해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馬嶽山) 중턱에다,
거주(居住)하고 있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의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의 조정에서 조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황제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몇 십년 뒤에 화재로 소실(燒失)되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그 잔해가 아직도 간혹 나오고 있다고 후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1599(선조 32, 己亥)년 3월 18(丁酉)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4월 24(癸酉)일 압록강을 건너고, 4월 25(甲戌)일에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윤 4월 기해(己亥)일에 복명(復命)했다.
이 때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어 5월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가을에는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의 감독(監督)직을 맡아 퇴계(退溪) 선생 문집(文集)을 처음 간행하였는데, 물자를 조달하며 이를 도왔다고 한다.
1601(선조 34, 辛丑)년, 선생의 나이 46세의 봄에 울진의 박곡(朴谷)을 얻어 박곡기(朴谷記)를 지었으며, 10월에는 예천군수를 제수받았으며, 12월에 예천 임소에 갔다. 1602(선조 35, 壬寅)년 2월에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으며, 여름에 안동(安東) 박곡(朴谷)을 얻어 정자(亭子)를 지었으며, 후박곡기(後朴谷記)를 지었다.
6월 13일 부인(夫人) 김씨(金氏)가 임소에서 사망하자, 9월 13일 김씨 부인을 수곡(水谷)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604(선조 37, 甲辰)년 봄에 완산이씨(完山李氏) 덕원군(德原君) 도정(都正) 추(樞: 成宗대왕의 4세손)의 여식과 혼인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약포(藥圃) 정간공(鄭簡公), 탁(琢)의 외손녀(外孫女)이다.
1606(선조 39, 丙午)년에 금성현령(金城縣令)을 제수받았다. 또한 어모장군행룡양위부사과겸여고(禦侮將軍行龍○衛副司果兼如故)를 제수받았는데, 이때에 명나라 군이 철병을 하기 위하여, 사신(使臣)의 상사(上使)로 한림편수(翰林編修)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로는 급사(給事) 양유년(梁有年)이 천자(天子)의 조칙을 반포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시문(詩文)에 능한 관리를 뽑아서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하였다.
이 때 해월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한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시 또한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기록되어 있다.
9월에는 영천(永川) 군수를 제수 받았다. 이 때 영천 지방에서 날뛰던 도적떼들은 해월(海月) 선생이 영천 군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1607(선조 40, 丁未)년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선생의 장자인 중윤(中允)과 더불어 임고서원(臨○書院)에서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 문집의 교정을 보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타서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본(舊本)과 서로 비교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며 문집(文集)을 완성시키려고 하였으나, 일개 읍(邑)의 힘으로는 일을 끝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 경상감사(慶尙監司)인 유영순(柳永詢)에게 청하여, 경주(慶州)와 더불어서 수개월에 걸쳐 그 문집(文集)을 완집(完集)하게 하였다. 또한 포은(圃隱) 선생의 연보(年譜)에,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 숨겨 두었던 영정을 베껴서 그려 넣었다.
7월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공(功)으로, 선무원종훈이등(宣武原從勳二等)의 녹(錄)을 받았다.
1608(선조 41, 戊申)년 9월 22일에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10월 19일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1612(광해 4, 壬子)년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제수 받았다.
1613(광해 5, 癸丑)년 봄 관직을 그만두고 귀가하여서는, 춘추(春秋)를 좋아하여 손수 연의(演義) 책 2권을 썼는데, 책의 이름은 인경연의(麟經演義)이다.
1615(광해 7, 乙卯)년에 동래(東萊)부사를 제수 받았다.
당시 동래(東萊)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러 고을이 피폐해져 있었다.
해월(海月) 선생은 먼저 백성의 주거(住居)를 안정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거주하는 곳이 안정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체통이 서지 않는다며, 전쟁에 불타 버린 곳을 깨끗이 씻어내고, 지붕을 잇게 하고, 처하는 일마다 태만히 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데 엄숙하고 의지가 굳으니, 왜인들이 삼가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한다.
또한 정치가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학교 세우는 일을 늦출 수 없다 하여, 학문을 하는 선비를 찾아서 사대(使臺)라는 직함을 주어 훈도(訓導)의 소임을 맡기고, 정부(政府)의 재정을 축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일을 시켜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
1618(광해 10, 戊午)년 8월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해월헌(海月軒)을 만귀헌(晩歸軒)이라고 고쳐 불렀다.
9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제수 받았다.
1619(광해 11, 己未)년에는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의 행장을 찬(撰)했다.
1620(광해 12, 庚申)년 가을에는 조정의 대신(大臣)들이 경상도 감사(嶺伯)로 추천했으나, 시를 써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1622(광해 14, 壬戌)년 4월 2일 병이 심해지자 부인 이씨에게 이르기를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라'고 이르고는, 자제들을 가르쳐 훈계하기를(敎訓) '집을 잘 돌보는 것이(保護門戶) 내가 깊이 기원하는 바이다(深祝)' 라고 하고는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일(産業)과 죽은 뒤의 일(後事)에 대하여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家席) 편안히 운명하셨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향년 67세였다.
이 때 나라로부터,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이라는 직함을 증직 받았다.
8월 13일 평해군의 서쪽 오태산(五台山)에 간좌지원(艮坐之原)으로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의 위패(位牌)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과 함께 모셔져 제향(祭享)되고 있다.
1774(영조 50년, 甲午)년에 문집(文集) 간행(刊行)을 시작하였고, 1776(영조 52년, 丙申)년 청명절(淸明節), 문집(文集) 7책 14권이 목판(木版)으로 완간(完刊)되었다.
책 서문(序文)을 보면, 영조(英祖) 50년인 1774(甲午)년 봄에 판각(板刻)을 시작하여 영조(英祖) 52년인 1776(丙申)년 봄 청명절(淸明節)에 목판(木版) 인쇄(印刷)를 끝냈다고 나와 있는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 서문(序文)은 이상정(李象靖, 1711(肅宗 37)년∼1781(正祖 5)년) 선생이 쓰셨던 것이다.
이상정(李象靖) 선생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호가 대산(大山), 자는 경문(景文)이며, 1735(英祖 11)년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1739년에는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산(大山) 서당을 짓고, 제자들의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에 연일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에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 경제잠집설(敬齊箴集說) 등 사상적(思想的) 기초를 정립한 저술(著述)을 남겼으며, 또한 사례상변통교(四禮常變通巧),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 그 밖에도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근원(根源)이 되는 이황(李滉) 선생의 사상(思想)을 계승하고 전승하는 입장에서 사상적(思想的) 터전을 마련한 분이다.
그는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고종(高宗) 때 이조판서로 추증이 되었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은 전체가 7책 14권으로 되어 있으며,
1∼4권 까지는, 시(詩)이고, 5권은, 부(賦)와 대책(對策)과 론(論)이며,
6권은, 서(書),
7권은, 소(疏), 장계(狀啓), 교(敎), 전(箋), 표(表), 송(頌), 기(記), 서(序), 발(跋),
8권은, 잡저(雜著), 제문(祭文),
9권은, 은사시(銀○詩),
10∼12권은, 은사일록(銀○日錄),
13권은, 전(傳), 묘지(墓誌), 행장(行狀),
14권은,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 문집(文集)의 발문(跋文)을 쓴 이세택(李世澤, 1716(肅宗 42)년∼1777(正祖 1)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이며 예안 출신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8대손이다.
1753(英祖 29)년에 정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나,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三司) 모두가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과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停啓)에 응할 것을 권(勸)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성격 또한 대쪽같이 곧은 품성(品性)을 지닌 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또한 찬집당상이 되었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신 분은 이유원(李裕元) 선생인데,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후손인 것이다.
이유원(李裕元, 1814(純祖 14)년∼1888(高宗 25)년)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이다.
1841(憲宗 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를 거쳐, 의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고종(高宗) 초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의 반목으로 1865(高宗 2)년 수원 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 해 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고, 1873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각(失脚)하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서임되었다.
또한 학문(學問)에 능하여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오고략(嘉梧藁略), 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도 능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국가에 큰 공(大功)을 세우고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인자(一人者)로 일컬어졌던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그 이유를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士之能享大名顯當世者 莫不有先達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前焉.
士之能垂休光照後世者 亦莫不有後進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後焉莫爲之前
雖美而不彰 莫爲之後 雖盛而不傳』
선비(士)로서 명성을 올려 그 시대에 유명하게 되는 자는,
그 사람보다 선배(先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갖고 있는 자가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는 일은 없고,
또 선비(士)로서 뛰어난 공적을 남겨 후세까지 명성을 나타내는 자는,
그 사람의 후배로서 천하의 인망(人望)을 얻고 있는 자가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는 자가 없다.
앞서서 추천하지 않으면 후배는 아무리 아름다운 재주와 덕을 지니고 있어도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고,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으면 선배의 사업이 아무리 성대(盛大)해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不傳).
끝으로 편집(編輯)과 교정(矯正)을 하여 주신 황유종(黃唯種)님과 함재식(咸在植)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김류나(金柳那) 근서(謹書) 후포향토지킴이 신 진 철
○난중일기
정유년(丁酉年)(1597년)
6월 6일 [양력 7월 19일]<을축> 맑다.
잠자는 방을 다시 발랐다. 군관이 쉴 마루 두 칸을 만들었다. 저녁나절에 모여곡 주인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尹鑑)․문익신 (文益新)이 와서 봤다. 종 경(京)을 이대백(李大伯)에게 보냈더니 담당 아전이 나가고 없어서 받지 못하고 그냥 왔다고 한다. 어두워서 집에 들어갔는데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
6월 7일 [양력 7월 20일]<병인> 맑다. 몹시 더웠다.
원수(권율)의 군관 박응사(朴應泗)와 류홍(柳洪) 등이 와서 봤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곧 사례하는 답장을 보냈다. 안방으로 들어가 잤다.
6월 8일 [양력 7월 21일]<정묘> 맑다.
아침에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황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이덕필(李德弼)과 심준(沈俊)이 와서 봤다. 고을 원과 그 아우가 와서 봤다. 원수를 마중 갔는데 원수 일행 여나믄 명 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오후에 원수(권율)가 진에 오므로 나도 나가 보았다. 종사관은 원수 앞에 있었고 원수와 함께 이야기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원수가 박성(朴惺)이 써 올린 사직서 초고를 보여 주는데, 박성(朴惺)이 원수의 처사가 소탈 하다고 진술하니, 원수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아 체찰사(이원익) 에게 글을 올렸다. 또 복병에 관한 일들을 낱낱이 아뢴 것을 보았다.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몸이 매우 불편하므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6월 9일 [양력 7월 22일]<무진> 개이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정상명(鄭翔溟)을 원수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다음에 종사관에게 문안했다. 처음으로 노마료(보수)를 받았다. 숫돌을 캐어 왔는데 질이 연일석(경북 영일에 나는 고운 돌)보다 좋다고 했다. 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문보 등이 와서 봤다. 이 날은 여필의 생일인데 혼자 수루터에 앉아 있으니 회포가 어떻겠노!
6월 10일 [양력 7월 23일]<기사> 맑다.
아침에 가라말․가라워라말․간자짐말․유짐말 등의 네 편자가 떨어진 것을 갈아 박았다. 원수의 종사관이 삼척의 홍연해(洪 漣海)를 보내어 문안하면서 좀 늦게 와서 보겠다고 한다. 홍연해 (洪漣海)는 홍견(洪堅)의 삼촌 조카이다. 어려서 죽마고우 서철 (徐徹)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 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봤다.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徐乫朴只)인데 밥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조용히 말하는 사이에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칭찬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데 대한 한 탄과 당면한 토벌․방비에 관한 대책이 허술한 것 등을 말하는 데,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돌아갈 것을 잊고서 이야기했다. 또 말하기를 내일은 원수가 산성을 살펴보러 간다고 했다.
6월 11일 [양력 7월 24일]<경오> 맑다.
중복 날이라 쇠를 녹이고 구슬을 녹일 것처럼 땅이 찌는 듯하다. 저녁나절에 명나라 차관 경략군문(唐差官軍略軍門) 이문경(李 文卿)이 와서 보므로,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 엊저녁에 종사관과 이야기 할 때, 변홍백이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어머니의 영연이 편한 줄은 알겠으나, 쓰라린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다만, 변흥백(卞興伯)이 나를 만나볼 일로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갔다고 하니, 참으로 한이 된다. 이 날 아침에 편지를 써서 변흥백(卞興伯)에게 보냈다. 아들 열이 토사로 밤새도 록 신음했다. 지짐 굽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다.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 이 날 아침에 한산도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썼다. 경의 모친이 편지를 보냈는데 지내기가 몹시 어렵다고 했다.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했다. 작은 워라말이 먹지 않으니 이것은 더위를 먹은 것이다.
6월 12일 [양력 7월 25일]<신미> 맑다.
종 경(京)과 종 인(仁)을 한산도 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경상수사(배설)․ 가리포첨사(이응표)․ 녹도만호(송여종)․ 여도만호(김인영)․ 사도첨사(황세득)․ 동지 배흥립 (裵興立)․ 조방장 김완(金浣)․ 거제현령(안위)․ 영등포만호(조계종)․ 남해현감(박대남)․ 하동현감(신진)․ 순천부사(우치적)에게 편지를 했다. 저녁나절에 승장 처영(處英)이 와서 보고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므로,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또 적의 사정을 말하고 또 원공 (원균)의 일도 말했다. 낮에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갔다고 한다. 어떤 일인지 몰랐는데, 원수(권율)에게 가보니, 우병사(김응서)의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했다. 복병군 을 보내어 길을 막고 적에게 위세를 뽐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병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일이 있어 원수에게 뵈러 왔다. 나도 원수를 보았다. 새벽 일찌기 돌아왔다.
6월 13일 [양력 7월 26일]<임신> 맑다. 저녁나절에 가랑비가 뿌리다가 그쳤다.
저녁나절에 병마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와서 봤다. 한 시간이나 넘도록 서로 이야기했다. 점심을 먹여서 보냈다. 이 날 낮에 왕골을 쪄서 말렸다. 어두울 무렵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의 종 이 들어와서, 주인이 우병사의 부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묵고 있다고 했다.
6월 14일 [양력 7월 27일]<계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와서 아산의 어머니 영연과 위․아랫사람들이 두루두루 무사하다고 한다. 쓰리고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가지고 우병사(김응서)에게 갔다.
6월 15일 [양력 7월 28일]<갑술> 맑고 흐리기가 반반이다.
오늘은 보름인데, 군중에 있으니, 어머니 영전에 잔을 올리어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이다 말하랴! 초계 원이 떡을 마련하여 보냈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군관을 보내 어 말하기를,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고 전했다. 나도 뒤를 따라 가서 큰 냇가에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앉은 채로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병이라고 아뢰게 하고서 그대로 돌아왔다.
6월 16일 [양력 7월 29일]<을해> 맑다.
혼자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아들 열 과 이원룡(李元龍)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했다. 저녁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병마사는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변광조(卞光祖)가 와서 봤다. 아들 열 은 정상명(鄭翔溟)과 함께 큰 내로 가서 전마를 씻고 왔다.
6월 17일 [양력 7월 30일]<병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이 쓸쓸하다. 밤경치는 한없이 넓기만 한데 새벽에 앉았으니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 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元均)의 정직하지 못한 짓을 많이 말했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 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元均) 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 하니, 안골포의 적 을 먼저 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 (元)이라는 사람은 전진하려고는 아니하고 오직 안골포만 먼저 쳐야 한다.'고 하였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대개 딴 마음을 품 고 있을 뿐더러 원(元)이라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나가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대책을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원수에게 이희남(李喜男)과 변 존서(卞存緖)․ 윤선각(尹先覺) 등에게 공문을 띄워 독촉하여 오게 했다. 올 때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가 앉아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나의 임시로 사는 집 에 와서 곧 이희남(李喜男)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다. 초계 원을 보았더니 이른바 양심이 없다고 할만하다.
6월 18일 [양력 7월 31일]<정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종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 절에 윤감(尹鑑)이 떡을 만들어서 왔다. 명나라 사람 섭위(葉 威)가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적병 십만 명 이 벌써 사자마(沙自麻)나 대마도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 ․대구 등지로 옮겨 안동 등지로 갈 것이다."고 했다. 저물무렵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사복 정상명 (鄭翔溟)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더니, 원수가 "수군에 관한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고 하였다.
6월 19일 [양력 8월 1일]<무인>
새벽에 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의 진에 이르를 즈음에 동트는 빛이 벌써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종사관 황 여일(黃汝一)이 나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 뵈었더니 원수는 원균(元均)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 데, 통제사(원균)의 하는 일이 말이 아니다. 흉물은 조정에 청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무슨 뜻이겠소? 질질 끌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에게 독촉하겠다. 통 제사(원균)는 이를 지휘할 것이 없다고 했다고 했다. 나는 또 조정에서 내려온 유지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가벼이 들어가 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원수가 간 뒤에 황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조금 있으니 초계 원이 왔다. 작별하면서 초계 원에게 하는 말이 진찬순(陳贊順)에게 심부름시키지 말라고 했더니 원수부의 병방 군관과 원이 모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돌아올 때 사 로잡혔다가 도망해 되돌아온 사람이 나를 따라 왔다. 이 날은 땅 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작은 워라말 풀을 적게 먹었다. 낮에 군사 변덕기(卞德基)․ 변덕장(德章)․ 변경완(卞慶琬)․ 변경남(卞敬男)이 와서 봤다. 진사 이일장(李日章)도 와서 봤다. 밤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6월 20일 [양력 8월 2일]<기묘> 종일 비오더니 밤에는 많이 내렸다.
늦은 아침 늦게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윤감(尹鑑)․문익신 (文益新)․문보 등이 와서 봤다. 변유(卞瑜)가 와서 봤다. 오후에 종과 말의 보수를 받아 왔다. 병들었던 말이 조금 나아졌다.
6월 21일 [양력 8월 3일]<경진> 비가 오락가락 하다.
새벽꿈에 덕과 율온과 대가 꿈에 보였는데, 다들 나를 보고 좋아하고 뵙고자 하는 기색이 많았다. 아침에 영덕현령 권진경 (權晉慶)이 원수께 뵈러 왔다가 원수가 이미 사천으로 갔으므 로 나에게 와서 보고 좌도의 일을 많이 전했다. 좌병사 군관이 편지를 가져왔다. 곧 회답편지를 써서 보냈다. 종사관 황여일 (黃汝一)이 문안을 보냈다. 저녁에 변주부(卞主簿)․윤선각(尹 先覺)이 여기와서 들어와서 밤까지 이야기했다.
6월 22일 [양력 8월 4일]<신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국(무우․두부․다시마․고기를 맑은 장 에 끓인 국)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기는 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이 있었다. 그 처사가 체모 없음을 말하여 뭣하랴! 저녁나절에 이 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 우병사의 편지를 전했다. 낮에 정순신 (鄭舜信)․정사겸(鄭思謙)․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문보 등 이 와서 봤다. 이선손(李先孫)이 와서 봤다.
6월 23일 [양력 8월 5일]<임오> 비 오다가 개다가 하였다.
아침에 대전(大箭)을 다시 다듬었다. 저녁나절에 우병마사(김 응서)에게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환도(環刀)의 크고 작은 것을 보냈다. 그러나 가지고 오는 사람이 물에 빠뜨려 장식과 칼집 이 결딴나버렸으니 아깝도다. 아침에 나굉(羅宏)의 아들 나재 흥(羅在興)이 그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봤다. 또 쪼들리는 데도 노자까지 보내어 주니 미안스럽다.
6월 24일 [양력 8월 6일]<계미> 이 날은 입추이다.
새벽에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골짜기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 침에 수사 권언경(權彦卿)의 종 세공(世功)․종 감손(甘孫)이 와 서 무우밭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무우밭을 갈고 씨부침하는 일의 감독관으로 이원룡(李元龍)․이희남(李喜男)․정상명(鄭翔 溟)․문임수(文林守) 등을 정하여 보냈다. 생원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보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 합천군수가 조언형(曺彦亨)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더위가 찌는 듯했다.
6월 25일 [양력 8월 7일]<갑신> 맑다.
다시 무우씨를 부침하도록 시켰다. 아침을 먹기 전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군사를 토론 하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저녁에 종 경(京)이 한 산도에서 돌아왔다.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놀라워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놀랍고도 애석 하며 놀라와 탄식했다. 한 놈의 적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 수를 잃었으니 통탄하고 한탄할 일이다. 거제도 사람을 보내어 미역을 실어왔다.
6월 26일 [양력 8월 8일]<을유> 맑다.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允福)이 현신하기에 곧 곤장을 쉰 대 때 렸다. 거제에서 온 사람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종 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개벼루 강가의 정자로 갔다가 돌아갔다. 어응린(魚應 )과 박몽삼(朴夢三) 등이 와서 봤다. 아산 종 평세(平世)가 들어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고, 집집이 위․아랫 사람들이 다 평안하다고 했다. 다만 석달이나 가물어서 농사는 틀려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장삿날은 7월 27일이나 또는 8 월 4일중에서 날잡는다고 했다. 그리운 생각에 슬픈 정회를 어 찌 다 말하랴! 저녁에 우병마사(김응서)가 체찰사(이원익) 에게, "아산의 이방(李昉)과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 곁으로 피해 있다."고 말하여, 체찰사 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니, 원수는 무척 성내어 공문을 다시 작 성하여 보냈다. 이 날에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버렸다.
6월 27일 [양력 8월 9일]<병술> 맑다.
아침에 어응린(魚應 )․박몽삼(朴夢三) 등이 돌아갔다. 이 희남(李喜男)과 이방(李昉)이 체찰사의 행차가 도착하는 곳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한참동안 이야기하 였다. 오후 세시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잠깐 사이에 물이 흘러 넘쳤다고 했다.
6월 28일 [양력 8월 10일]<정해> 맑다.
저녁나절에 황해도 백천에 사는 별장 조신옥(趙信玉)․홍대방 (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초계 아전의 편지에, "원수가 내일 남원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 날 새벽꿈이 몹시도 뒤숭숭하였다. 종 경(京)이 물건을 사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6월 29일 [양력 8월 11일]<무자> 맑다.
변주부가 마흘방으로 갔다. 종 경(京)이 돌아왔다. 이희남(李喜 男)․이방(李昉) 등이 돌아왔다.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심준 (沈俊)이 와서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잡아가는 데, 총병관 양 원(楊元)이 삼가에 이르러 꽁꽁 묶어 보내더라고 전했다. 문림 수(文林守)가 의령에서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벌써 초계역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로 급제한 량간(梁諫)이 황천상(黃天祥)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변주부가 마흘 방에서 돌아왔다.
6월 30일 [양력 8월 12일]<기축> 맑다.
새벽에 정상명(鄭翔溟)을 시켜 체찰사에게 문안했다. 이 날 몹시 더워 땅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흥양의 신여량(申汝樑)․신제운(申霽雲) 등이 와서, 연해의 땅은 비가 알맞게 왔다고 전했다.
정유년 7월 (1597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3일]<경인> 새벽에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명나라 사람 세 명이 왔다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송대립(宋大 立)과 송득운(宋得運)이함께 왔다. 안각(安珏)도 와서 봤다. 저녁에 서철(徐徹) 및 방덕수(方德壽)와 그 아들이 와서 잤다. 이 날 밤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그대로 송득운(宋得運)은 원수의 진에 갔다가 왔는데,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불렀다고 하니 놀랍고 놀랄 일이다. 오늘은 인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7월 2일 [양력 8월 14일]<신사> 맑다.
아침에 변덕수(卞德壽)가 돌아왔다. 저녁나절에 신제운(申霽雲)과 평해(平海)에 사는 정인서(鄭仁恕)가 종사관의 심부름으로 문안하러 여기 왔다. 오늘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일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사람의 일이 어찌 이러냐!
7월 3일 [양력 8월 15일]<임오>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속으로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층 더했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저녁나절에 정읍의 군사 이량(李良)․최언환(崔彦還)․건손(巾孫)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저녁나절에 장준완(蔣俊 琬)이 남해에서 와서 보고 남해 원의 병이 중하다고 전하였다. 몹시 민망하다. 조금 있으니 합천군수 오운(吳澐)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황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종사관은 전적(典籍) 박안의(朴安義) 와 활을 쐈다. 이때 좌병마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 왔다. 그 때 고령 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7월 4일 [양력 8월 16일]<계미> 맑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방(李芳)과 류황(柳滉)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러 왔다. 흥양의 량점(梁霑)․찬(纘)․기(紀) 등이 왔다. 변여량(卞汝良)․ 변회보(卞懷寶)․ 황언기(黃彦己) 등이 모두 벼슬했다고 와서 봤다. 변사증(卞師曾)과 변대성(卞大成) 등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뿌렸다. 아침밥을 먹을 때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봤다. 어두어서 비가 많이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7월 5일 [양력 8월 17일]<갑신>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초계원이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경내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에서부터 영문을 지나갔다. 저녁나절에 변덕수(卞德壽)가 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마흘방(馬訖坊)으로 갔다.
7월 6일 [양력 8월 18일]<을유> 맑다.
꿈에 윤삼빙(尹三聘)을 보았는데 나주로 귀양 간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이방이 와서 봤다. 홀로 빈방에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바깥채에 나가 앉았다. 변존서 (卞存緖)가 마흘 방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각(安珏) 형제도 변흥백(卞興伯)을 따라 왔다. 이 날 제사에 쓸 중배끼 다섯 말을 꿀에다 반죽하여 시렁에 얹었다.
7월 7일 [양력 8월 19일]<병술> 맑다.
오늘은 칠석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어찌하랴! 꿈에 원균(元均)과 같이 모였다. 내가 원균(元均)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균(元均)이 기쁜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에서 와서 그 주장의 잘못으로 대신 죄 받으러 원수에게 잡혔다고 했다. 초계 현감이 햇물건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아침에 안각(安珏) 형제가 와서 봤다. 저물어서 흥양의 박응사(朴應泗)가 와서 봤다. 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의령현감 김전(金銓)이 고령에서 와서 병마사의 잘못된 일을 많이 말했다.
7월 8일 [양력 8월 20일]<정해> 맑다.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집 주인 이어해(李魚海)와 최태보(崔台輔)가 와서 봤다. 변덕수 (卞德壽)가 또 왔다. 저녁에 송대립(宋大立)․류홍(柳洪)․박영 남(朴永男)이 왔다. 송과 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 9일 [양력 8월 21일]<무자> 맑다.
내일 아들 열을 아산으로 내려 보내고자 한다. 제사에 쓸 과일을 봉하는 것을 살펴봤다. 저녁나절에 윤감(尹鑑)․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주부 변존서(卞存緖) 등에게 전별하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달빛이 대낮 같았다. 어버이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면서 밤늦도록 잠을 못잤다.
7월 10일 [양력 8월 22일]<기축> 맑다.
열과 변존서(卞存緖)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가 일찌기 아침밥을 먹는데 정회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종사 관 황여일(黃汝一)도 와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정상명(鄭翔溟)이 싸움터에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종이로써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이 끓어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7월 11일 [양력 8월 23일]<경인> 맑다.
열이 어떻게 갔는지 생각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다. 더위가 너무도 심하여 걱정뿐이다. 저녁나절에 변홍달(卞弘達)․신제운(申霽雲)․림중형(林仲亨)이 와서 봤다. 홀로 빈 대청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너무도 비통하다. 종 태문(太文)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7월 12일 [양력 8월 24일]<신묘> 맑다.
아침에 합천이 햅쌀과 수박을 보냈다. 점심밥을 지을 적에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홍우공(洪禹功)․ 림영립(林英立) 등이 박명현(朴名賢)이 있는 곳에서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종평세(平世)는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잘 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슬퍼서 탄식함을 어찌 말로써 하랴! 이희남(李喜男)이 사철쑥(더위지기, 생당쑥; 입추때에 베어 말려 냉, 황달, 습열, 간장염 등의 한약재로 씀)백 묶음을 베어 왔다.
7월 13일 [양력 8월 25일]<임진> 맑다.
아침에 남해현령이 편지를 보내고, 음식물도 많이 보냈다고 하고, 또 싸움말(戰馬)을 몰고 가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태수 (李台壽)․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이 와서 보고, 또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였다. 송대립(宋大立)․장득홍(張得洪)도 왔다. 장득홍은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양식
작성일:2007-07-12 22: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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