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선지식들께서는 하나같이 깨달음이란 ‘세수하다가 코만지는 것만큼 쉽다’고 말씀하신다. 필자 역시 여기에 동감한다. 말 그대로 이해하면 ‘세수 할 때 마다 손으로 코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너는 네가 행(行)하고 있는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습관으로 이어지는 일상에서 손으로 코를 잡고 풀면서도, 손으로 코를 잡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다른 의미로는 ‘엄마’
인간은 살아가며 대목대목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 즉 행복을 이루겠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새해는 바람도 많고, 그것에 도달하는데 방해 (부정 탄다) 가 된다는 금기도 많았다.그것이 지나치면 억압과 차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초가 되면 특히 ‘여자는 어디 어디를 가서는 안 된다’ 는 등 현재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금기들이 곳곳에 있었다.따져보면 그 시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천태종과 같은 불교교단은 비구니스님(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천주교에서는
‘사물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는 견색명심(見色明心)이라는 말이 있다. 견색(見色)이란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하고, 명심(明心)은 견색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 ‘얼음녹아 물이 되고, 물이 얼어 얼음 되듯’ 일체만물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연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가립(假立)의 존재들임을 알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그러나 견색이 있은 연후에 명심이 따른다. 실체의 궁극에 가서는 색(色)이 허망하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 강을 건너는 데 배가 용이하듯 말이다.일반적으로 색(
우리 선조들은 자연, 그 중에서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왔다. 농사는 해(태양)가 기준이 됨으로 24절기로 구분하였고, 사람의 생체는 달의 영향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매일 달라지는 모양으로 날짜를 가늠할 수 있어 음력은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이러한 고려 없이 한때 음력은 무언가 부족하고 잘못된 것인 양 취급되었고, 일방적으로 모든 기준을 양력 중심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동지를 ‘버금가는 설날’ 이라는 뜻으로 아세(亞歲)라 하고, 양력 1월 1일은 해는 바뀌었지만 대충 그렇게 넘어가고, 당연한 듯 음력설을 쇤다.
‘개식용 금지법’ 논쟁이 뜨겁다. 입법 이전에 전통문화와 사회현상의 측면에서 충분히 논의 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반려동물이라는 논리가 강조 되고 있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미개한 식문화라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구비문학에는 주인의 은혜를 갚은 ‘오수 개’와 같은 이야기가 전국에 산재되어 있고, 필자가 사는 홍성에도 똑 같은 내용 전개를 가진 의견비(義犬碑)가 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입장에서 개식용 여부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 불교를 비롯한 아주 오래된 사회적 타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86아시안게임 이전까지는 삼겹살
작년가을 충남 홍성 남당항에서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최창원(혜전대교수) 작가가 석 달 동안 하루 10시간씩 폭 120cm, 길이 100m의 화지(畫紙)에 1만 마리의 새우를 그렸다는 ‘해하도(海蝦圖)’를 미국 세계기록위원회(WRC)와 한국기록원(KRI)에 등재하기 위함이었다.작가는 ‘세계 평화를 염원하고 해양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며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아무런 설명 없이 –독화법을 모르는 듯- 새우는 동양화에서 매우 중요시하고 있는 소재라고만 했다. 여느 행사처럼 한국대표들의 일상적 인사말이
국기가 나라의 상징이듯 세상은 상징으로 소통한다. 말이라고 하는 언어 역시 상징에 해당하며, 유식학(唯識學)에서 인간은 언어로서 정보를 저장(기억)한다고 정의한다. 말이 귀를 통하는 소통의 상징이라면, 문자, 그림 등은 눈을 통해서 소통되는 상징이다. 지난 호에 울진을 대표하는 사찰인 불영사(佛影寺)는 산등성에 부처를 연상시키는 바위가 연못에 비치는 것에서 불러진 이름이며, 현재는 관리부실로 그 모습 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불영사라는 이름은 자연현상이 문자라는 상징으로서 표현되었다. 그래서 직접 보지 않은 사람도 문자를 이해
시내에 나서면 사람과 자동차는 각각에 주어지는 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고, 주행을 한다. 상징으로서 사회적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사회의 모든 것은 상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찰은 불상을 모시고, 교회에서는 십자가로서 정체성을 나타낸다. 결혼의 증표로 예물을 주고받는 것도 그렇고, 말과 글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느 연속극 대사에 재벌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사적 감정을 나무라며, ‘아랫사람을 부렸으면 돈을 주면 그만이지, 왜 마음을 전하는 선물을 주느냐’며, 질타하는 대목이 있다. 돈은 노동의 대가이고, 선물은
'다움(답다)’ 이란 완성된, 이루어진, 갖추어진, 모범이 될 만한 등의 의미로서 세상과 인간이 장차 나아갈 바를 함의하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아름’이라는 개개(箇箇)가 ‘다움’으로 완성되어 하나로 어우러짐’에 근원을 둔다. -사사로울 사(私)를 과거에는 아름 사(私)로 새겼으며, 개인의 견해를 ‘알음알이’라하고, 현재도 ‘알음알음으로 안다’는 말 등이 사용된다- 이러한 연유로 이미 사람이지만 또다시 ‘사람다움’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즉, ‘사람다움’ 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온전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민족이, 우리나라가,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에 비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자학적 식민사관의 불행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필자는 오래전부터 애국가 가사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해 오고 있다. 네 번을 불러야하는 후렴구 “무궁화 삼천리”라는 부분이다. 정식 국화(國花)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인식이 굳어진 무궁화는 강효백의 저서 「일본 무궁화 가라, 한국 진달래 오라」 와 같은 논쟁이 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최근 들어 인류문명의 원형으로 확인되는 고조선으로부터, 대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 만년 민족의 역사를 삼천리
지난 호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세계를 두레박질 치는 윤회육도는 어떤 장소에 태어난다거나 짐승과 같은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당장 처해있는 심리상태라 했다. 여섯 가지 상태는 외부의 조건에 상응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최고 권력을 누릴 때는 천상의 행복이지만 권력을 잃고 감옥에 가면, 곧바로 지옥의 고통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종교를 필두로 인간사회의 모든 행위는 알게 모르게 윤회육도를 벗어나려는 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재벌이 되어도 돈은 지켜야하고, 권력을 잡는 동시에
세상이 개벽 한다하더라도 인간세계는 형태만 다를 뿐 그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욕망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학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나누어 군자의 도를 인생의 모범으로 가르치고, 기독교에서는 믿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분류하며, 죽음에 이르러 神으로부터 평생의 삶을 심판받는 구조이다. 불교역시 중생과 부처로 구분하며 지혜를 체득하여 자업자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종교간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이 일으키는 문제를 지적하고 극복하여 행복에 이르는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문화는 크게 물질문화(도구문화)와 비물질문화(정신문화)로 나누고, 비물질문화는 관습문화와 규범문화 등으로 분류된다. 생활의 편익을 제공하는 도구, 주택 등의 물질문화는 금방 받아들여 적응하지만 관습문화와 규범문화는 고집스럽게 변화를 거부하는 특성이 있다. 직접운전하지 않고서도 리모컨으로 주차 가능한 최첨단의 반자율주행 자동차에 부득부득 고사를 지내야 직성이 풀리고, 부적이나 종교적 상징물을 비치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심리현상이 관습문화의 전형이다. 이렇다보니 필자가 사는 산에도 정월이 되면 시산제를 지내려는 등산모임들이 줄을 이루
변화는 세상의 본질이다.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의례를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것 역시 사회적 욕구의 강도에 따라 변화속도와 폭이 달라진다. 문제는 속도와 의미의 왜곡이다. 수 천 년 이어진 농경사회에서는 삶의 방식이 거의 동일했으며, 느린 변화만큼이나 의례의식은 원형의 답습을 고수해 왔으며 세대 간 저항은 미미했다. 그러나 스마트폰 기능 하나 익히기에도 급급한 현대 IT사회는 구성원 대부분이 자본문명으로부터 낙오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 살 터울 형제간에도 세대차이가 날 만큼 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비교적 변화가
우리말에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고 우연히 만나서 함께 사는 남녀’를 일컫는 ‘뜨게부부’라는 단어가 있다. ‘뜨게’라는 말은 ‘옷감을 잘라 본을 뜨다’와 같이 ‘흉내 내어 그와 똑 같이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뜨게부부’는 ‘부부 흉내를 내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남녀 간의 일은 둘 밖에 모른다 하듯이 살다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혼인신고라는 법적절차를 마쳤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뜨게부부’라 하여 결혼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연히 라는 말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규칙과 질서 즉, 기준이 있어야한다. 규칙과 질서에 타율적강제성이 부여될 때 법(法)이라 하고, 자율적강제성으로 통제되는 것은 도덕적 규범이라 한다. 이때 도덕적 규범이 요구하는 자율적강제성은 법이 규정하는 처벌과는 다른 사회적 압박으로서의 강제성이다. 예의는 도덕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엄청난 구속력을 가지며, 때로는 처벌이 따르는 법 이상의 불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직장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몹쓸 사람)으로 취급되면, 삶이라는 인생자체가
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현재 우리나라의 나이세는 방법이 ‘세는 나이’, ‘만 나이’, ‘연 나이’ 등 3가지 방식이 혼용되고 있어 법과 제도운영에 혼란과 불편이 따른다며, ‘만 나이’ 사용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고, 인터넷 등에 ‘만 나이계산기’가 제공되고 있다. 무엇에 근거하여 우리 조상들은 태어나면서 한 살이 되고, 섣달그믐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다음 날 하루가 채지나지 않아 새해를 맞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 살이 되는 것일까? 무지하고 무식해서 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분명히 아닌 것 같다.
옛날 어느 마을에 가세는 그리 넉넉지 못하지만, 부모 잃은 어린 조카를 자기 자식과 차별없이 정성껏 돌보는 선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소문은 고을에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지만, 선비는 언제나 부족하고 부끄럽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어느 날 마음을 나누는 속 깊은 친구에게 고백하기를 “마을사람들이 말하듯 조카를 내 자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키우는 것은 분명하네, 평소에는 마음 어느 구석에서도 차별을 찾아 볼 수 없다네, 그런데 내 자식이 아프면 밤에 잠이 오지 않지만, 조카가 아프면 아무리 참아도 잠이 들고
초가삼간의 행복 40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야만 했던 생명체들이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한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 는 생환(生還)의 길이다. 그래서 도구를 사용할 수 없는 생명체들은 신진대사를 조절하여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잠을 선택한다. 인간에게 좋은 집의 기준이란,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디는 데 얼마나 적합한 구조를 가졌는가 이다. 그래서 우리 한옥은 냉난방이 가장 잘되는 구조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을 지으면서, 여름철 냉방은 대류현상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십분 활용했고, 겨울의 난방은 온돌이라는 독특한
초가삼간의 행복 39 인간은 말과 글로서 생각을 전달하고 공유한다. 그래서 예전 한국인들은 따뜻한 아랫목이라고 하면, 그와 연관하는 사건들을 떠올리고 동질의 정서를 느낀다. 그러나 불[火]이라 말해도 입이 뜨겁지 않고, 불이라는 글자를 수십만 장을 써서 책으로 묶어도 종이가 타지 않는다. 하지만 매실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침이 고이지 않는가! 불교학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해 말과 글은 진리인가 아닌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말과 글은 진리(승의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진리를 설명하는 세속제로서 가치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