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환쟁이가 시대정신을 읽어

 

시내에 나서면 사람과 자동차는 각각에 주어지는 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고, 주행을 한다. 상징으로서 사회적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사회의 모든 것은 상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찰은 불상을 모시고, 교회에서는 십자가로서 정체성을 나타낸다. 결혼의 증표로 예물을 주고받는 것도 그렇고, 말과 글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느 연속극 대사에 재벌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사적 감정을 나무라며, ‘아랫사람을 부렸으면 돈을 주면 그만이지, 왜 마음을 전하는 선물을 주느냐, 질타하는 대목이 있다. 돈은 노동의 대가이고, 선물은 마음이라 규정한다. 부리는 사람에게 돈이 아닌 선물을 주는 것은 사적 감정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호 (인터넷 판) 에서 전통제사상 차림이 상징하는 의미를 알아보았다. 제사상 차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상징으로서의 문인화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역사에서 뛰어난 화가들이 많지만, 그 중에 단연 백미는 김홍도이다. 김홍도는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 그 시대(성리학)가 구현하고자 하는 최고의 지위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학문의 목적은 수신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君子之學 修身爲半 其半牧民也)’이라 했다. 다시 말하면 학문(상징)을 목민이라는 현장에서 구체적사실로 완성시키라는 것이다. 김홍도는 젖니를 갈기 시작할 쯤부터 강세황의 집에서 심부름을 했다. 강세황의 추천으로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전담 사진사에 해당하는, 궁중행사의 기록인 의궤 등을 그리는 궁중화가가 되었다. 의궤나 풍속화는 기록으로서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지만, 그야말로 환쟁이 기술자로 보아야 한다.

이에 반해 당시 사대부들이 주로 그렸던 문인화(文人畵)는 이름에서 보듯이 학문과 문자(文字)와 동격을 이루는 수신(修身)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문인화에는 구도나 창작성을 따지지 않음으로서 남의 것을 베꼈다는 모작의 시비가 없다. 예를 들면 수 백 장 모두 같은 구도의 그림, 노인이 두 발을 강물에 담그고 있는 탁족도(濯足圖)가 있다. 이것은 회화의 양식을 빌렸을 뿐 좌우명처럼 벽에 걸어 놓고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는 용도이다. 탁족이라는 상징은 궁궐과 선비들이 공부하는 정자에서도 두 기둥을 물속에 세우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탁족도는 초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이 정치개혁에 앞장섰다가 실패하여 벽촌에 살 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강가의 한 어부가 굴원에게 이곳에 사는 연유를 물었다. 이에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던 굴원은 세상이 다 썩었어도 나 홀로 깨끗했고, 모두가 다 취했을 때도 나는 혼자는 깨어 있었소. 그래서 쫓겨난 것이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放)”라고 답했다. 그러자 어부는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하며 사라졌다. 굴원의 고사(古事)는 후대 맹자(孟子)에 인용되어 사단칠정의 사단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탁족도에서 굴원의 개혁의지를 읽어야 하고, 비록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패를 했더라도 남을 탓하지 말라는 어부의 일갈에서 사단칠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김홍도는 자신이 그리는 문인화가 담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수신으로 체화(體化) 했고, 그것을 인정받아 역()을 관리하는 찰방이 되었고 이후 목민관인 현감이 되었다. 이렇듯 어떤 것이 만들어 질 때는 필연의 연유가 있는 법이니, 어찌 옛것이라 함부로 버릴 수 있겠는가. 일개 환쟁이가 상징을 통해 시대정신을 읽어 내었듯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우리문화를 읽어내는 지혜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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