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이 구정이다. 아마 우리 민족에겐 가장 큰 명절일 것이다. 이날은 객지에 나가있던 자식들이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고 조상님들께 차레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찾아오기 때문에, 흔히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진다고 말한다,아이들에게 설날은 매우 즐거운 날이다. 새 옷을 입는 즐거움, 세배 돈 받는 즐거움, 새 양말을 신는 즐거움, 이런 것 때문에 설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필자가 어릴 때 만 해도 설날 세시풍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설 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하여 밤새도록 뜬눈으로 새운 적도
용(龍)띠의 해인 갑진년(甲辰年)이 열렸다. 12간지의 동물 중 유일하게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혹여나 1월 1일 일출을 보려고 며칠 전부터 은근히 가다렸지만, 전날 오후부터 시작된 비는 다음날 까지 종일 그치지 않아 하루 종일 해 구경을 하지 못했다,용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동물이지만, 우리의 전설이나 설화에도 많이 등장한다.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전국에서 용과 관련된 지명이 1,261곳이며, 경북 지역만도 174개소에 달한다고 한다,또한 용은 우리 민족의 설화나, 역사에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용은 온갖
김성준 울진문화원장이 종합중앙문예지 2020년 10월호에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 수필문학 작가로 데뷔했다. 박효석 등 4명의 심사위원들은 김 원장의 ‘운동화’, ‘1kg 행복’ 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김 원장의 응모작들을 보면 소재들이 소박하다. 그래서 그런지 문체가 소박체다.”“문체가 화려하거나 창조적인 문학성을 지니고 있진 않지만, 여름날 평상에서 어른들의 살아 온 삶을 듣는 것 같은 편안한 정서가 글 내용 전반에 흐르고 있어, 진정성이 가슴에 와 닿는다.”“김 원장의 이번 당선작은 꾸밈없는 솔직성과
김성준 문화원장의 역사기행 오호라! 4백년전 참혹했던 역사 현장이 눈앞에 생생히...왜병에 항전하던 고산성 병사 몰살, 피로 물들어울진의 최대 역사 유적지 복원, 충절정신 어어야 임진왜란 유적 고산성 (古山城) 편 고산성(古山城)은 울진읍 고성리 산 3-2 일대로, 속칭 ‘성밑마을’ 뒷산이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울진 주민들이 마지막 까지 죽음으로 항전했 유적지로서 잊지 못할 뼈아픈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산성의 흔적을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일부 석축이 남아있고, 망루의 흔적과 우물,
며칠만 있으면 10월 9일 한글날이다. 우리의 문자인 한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가장 우수한 문자이다. 유네스코는 1997년 10월1일 한글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유네스코는 세계 민족들이 쓰는 2,900여종의 언어에 대하여 연구하고 언어를 글자로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문자를 선정했다. 여기서 한글이 최고 점수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광복되던 이듬해부터 매년 10월 8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국경일로 지켜 왔는데, 1991년부터 국경일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과 전문가들의 항의에 의하여
민통선 안 개척민으로 울진을 떠나던 날 사라호 울진이재민, 군용트럭에서 초죽음 매년 4월 4일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70년전인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울진군 근남면의 66세대 300여명의 주민들이 강원도 철원군의 황무지를 찾아 떠났던 날이다. 그분들이 이주한 철원 땅은 6.25전쟁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DMZ였고, 곳곳에 지
산성에서 태어난 6남매는 첫째가 김정란(여), 둘째는 김현식(남)인데 군에가 사망. 셋째 김진태(아들), 넷째 김진선(남)인데 미혼으로 사망. 다섯째 딸인데 10세 정도에 죽었고, 여섯째가 막내인데 김옥란 할머니다. 김옥란 할머니의 4남매는 모두 산성에 살면서 결혼 했다고 한다. “ 우리 할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남의 집도 지어주고 해서 생
삼한 전기 패망한 ‘실직국’ 후예 피난처병위 포전 등 마을명이 왕피 뒷받침안일왕 성내 1960년대까지 1가구 살아 ○ 안일왕 산성의 위치 및 역사적 내력금강송면 소광리에 소재하는 안일왕산에는 안일왕 산성과 대왕송이 있다. 안일왕 산성은 삼척 실직국의 왕이었던 안일왕이 신라왕의 침략에 패하여 울진의 소광리까지 쫒겨와서 성을
머릿말1948년6월 8일 울진의 어부들이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던 중, 미군의 오인 폭격으로 울진인 어부 8명중 6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의 각 언론사들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자, 경상북도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고 독도현지에 위령비를 세우고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폭격 사건은 세인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났고, 현지에 세워졌던
▲김성준 (울진문화원장/본사 집필위원)의상전은 산 정상에 있었다./불영사 뒤쪽 국도에서 촬영의상 등 眞影 모신 곳 옛 터만 남아현재의 의상전은 본래 인현왕후 원당 김성준 집필위원 (울진문화원장) ▲의상전 건물 뒤의 기괴한 암석들1. 개요불영사는 울진의 대표적인 사찰로 신라 진덕여왕 5년(561)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불영사는 임진왜란 때 큰 화재를
요즘은 건축방식이 다양하고 누구나 건축기술을 쉽게 배울 수도 있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건축기술자는 매우 귀했다. 특히 한옥양식의 전통 건축물을 짓는 목수는 매우 귀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목수를 대목수, 또는 대목장이라 했다.그래서 중요하고 큰 건축 공사는 대개 대목장의 감각과 노하우에 의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울진 출신
뛰어난 지략`용맹함으로 5백 의병 지휘울진 등 6개지역 3년여 활동, 왜군 무찔러 6월1일은 「의병의 날」이다. 더구나 금년은 3.1 독립만세 사건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흔히 의병이라 하면 20세기 전후의 항일 의병만 연상하게 되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수는 관군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1. 삼국유사의 헌화가 - 삼국유사 권 2 성덕왕(聖德王)편에 「수로부인」의 내용이 기록이 있다.「水路夫人」 - 「聖徳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 溟 今 州行次海汀晝饍. 傍有石嶂如屛臨海, 髙千丈, 上有躑躅花盛開. 公之夫人水路見之謂左右曰, “折花献者其誰.” 從者曰 &l
기성면 척산리에서 평해 방향으로 커브를 돌면, 울진비행장 올라가는 입구에 (정명리 산 26-1) 아담한 비각이 하나 있다. 비각 내부에는 효자 안응준과 안망문의 처 열여 남씨 비석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이 비석은 1873년(고종10) 안씨 문중에서 세웠다. 효자 안응준에 대한 이야기는 울진군지를 비롯해 여러 효자전 등에 소개 되어있으나, 그 근원은 이산해의
효부 김해 김씨 김한전(金閒田)은 울진군 매화면 오산3리 무릉동 사람으로 병든 시부모에게 너무나 극진하고 진실되게 효도를 함으로서,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되어 지역 유림들이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표창을 상신하는 한편, 지방관리들도 직접 조사와 확인을 거쳐 표창함으로써 지역의 자랑거리로 삼았다. 파평(坡平) 윤씨 문중에 효부 김씨의 포창 완의문과
울진읍 명도2리 ‘아산동’ 마을을 지나 서북쪽 방향의 포장도로를 따라 언덕길을 올라가면, 속칭 ‘세거리(三街)’ 라고 불리우는 고개 정상에 이른다.세 마을로 갈라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세거리의 중앙에 둘레석으로 잘 단장된 쌍분과 비석을 볼 수 있다.비석의 주인공은 ‘노원달(盧元達)’ 효자이며, 쌍분은 ‘노원달’ 효자와 부인인 ‘仁同 張氏’ 의 묘다. 효자의 諱는 원달(盧元達), 字는 종선(鍾宣)이며, 1906년 울진읍 명도리에서 노치복(盧致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달(元達)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말씀에 거역하는
주 효자의 본관은 신안(新安) 이름은 경안(景顔), 字는 여우(汝遇) 추호(追號)는 충효당(忠孝堂)이며 참봉(參奉) 세홍(世弘)의 아들로 울진인이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진실되고 조심스러웠으며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잘 섬기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다.그가 20살 때 부친이 학질을 앓아 1년간이나 낫지 않으므로 남사고 선생에게 조언을 구하니, ‘인
통고산 자락의 어느 산골마을 사람들은 허구헌날 농사일만 하다보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길이 없었다.서당도 없고 글을 가르칠만한 선생님도 없었다. 어느날 마을 주민들은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다.결론은 외부에서 선생을 모셔다가 서당을 열자고 의견을 모았다. 마침 이 마을의 촌장격인 어른의 사위가 읍내 근처에 사는데, 글께나 하는 선비라고 했다.그런데 모셔 온 이 선생은 모든 언어를 문자를 써서 말하니, 마을 사람들이 매우 유식한 줄 알았다.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항상 큰 소리로 야단을 쳐마을 사람들은 그를 “꽥 선생
금년 삼복은 유난히도 덥다, 더구나 짊어진 소금이 더위에 녹아 내리는지 갈수록 더 무거워짐을 느낀다. 북면 흥부장에서 소금을 한포대 사서 짊어지고 봉화 내성 장으로 팔러가는 보부상 김공(金公)은 인적 없는 산중 고개를 혼자 넘고 있었다.덥고 무거운 짐 때문에 걸음이 느리다 보니 일행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주막은 멀었는데 어느새 어둑어둑 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