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성준(울진문화원장 겸 울진신문 집필위원)


미역 채취 울진어민 6명 등 2백여명 사망

유족회의 박용길 대표, 진실 규명후 화해해야  
   

 

Ⅰ머릿말

1948년6월 8일 울진의 어부들이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던 중, 미군의 오인 폭격으로 울진인 어부 8명중 6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의 각 언론사들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자, 경상북도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고 독도현지에 위령비를 세우고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폭격 사건은 세인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났고, 현지에 세워졌던 위령비 마저 감쪽같이 없어져 이 사건은 역사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한 유골문제로 일생을 가슴에 한을 안고 살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유족들은 억울한 참사의 진실을 많은 국민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며 위령비라도 세우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 사건 개요


해방된 지 3년쯤의 일이었다. 1948년 6월 8일. 육지의 어민들은 매년 독도 인근으로 어로 작업을 하러 다녔다. 죽변의 오0석 사장이 어부들을 뽑아 독도 앞바다에서 미역채취 작업을 하던 참이었다. 채취한 미역은 독도에 상륙해서 바위에 걸쳐 말린 후, 배에 싣고 육지로 오는 것이다.
한창 작업에 열중하던 점심 때 쯤인가 갑자기 미역 채취 작업을 하던 어민들의 머리위에 폭탄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어부들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치고 옷을 벗어 흔들며 울부짖었지만, 아랑곳없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수많은 어부들을 희생시켰고 많은 배들이 파손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와 고기잡이하던 어민들도 많아 전체 피해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였다.
이날 울진에서 간 어민들은 모두 8명으로 6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2명이 천우신조로 살아 돌아왔다.


○ 1948.6.13일자 남선신문 기사

◆울릉도 사변 속보 기(旗)의 표식도 본체만체 고의로 기총으로 맹사(猛射)
【울릉도에서 柳在明특파원 12일 발 합동】

지난 8일 상오 독도 부근에서 연습중으로 보이는 모 국기의 폭격기 총소사 등으로 10여척의 어선이 격침파(擊沈破)되었다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그후 10일 하오 9
시 현재 판명된 피해는 다음과 같다.
사망자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 진리 김준선(20) 시체수용, 울릉도 남면 우동 최태식(34) 시체수용,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삼율리 김동술(39) 시체 미발견, 이하 11명 행방불명. 경찰측에서는 사망으로 인정하고 있음.
강원도 죽변 권천이 김응화. 박춘식. 조성룡. 오재옥. 이춘식. 울능도 도(이상 11명). 고원오. (19),김해술(19), 제일수(28), 울능도 남면 우동 김해도(21), 김태현(30), (이상11명) 중상자 강릉군 흑호읍 이완식(34), 울능도 남면 우동 이○남(31), 동우 장학군(35), (이상3명)

그리고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김해리 김태홍(25), 동상 최만일(33), 동면 후보리 최춘삼(44), 경북 영덕군 매동면 백석리 김대진(34) 등 4명은 구호선으로 울릉도에 도라와 10일 부산행 운수부 연락선으로 포항에 귀환하였는데, 김태흥씨는 당시를 회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확실히는 모르나 그때 해상에는 약 23척의 선박이 있었는데, 그중 발동선 두척과 (뎀마) 두척이 겨우 사격을 면하야 귀환 하엿을 뿐이다. 그런데 현장에 잇던 어선들은 태극기를 꽂고 있었으며, 또 폭격을 받을 때, 우리들은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엿으나 결국 화를 면치 못하엿던 것이다.” 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사망한 어부는 울진읍 온양1리 ○박춘식씨 ○조성룡씨 ○오재옥씨 ○김응화씨. ○이춘식씨, ○삼율리 김중광씨 등 6명이며, ○권진문씨와 ○오재덕씨는 생명을 구했다.

 

○ 유실되었던 ‘어민 위령비’를 다시 세우다

한국 정부는 어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사건 2주기가 되는 1950.6.8.일 높이 1m36cm 폭43cm 크기의 오석으로 만든 위령비를 독도 선착장 몽돌 해변 절벽 아래에 세워 주었다.

그러나 비문에는「독도 조난 어민 위령비」라고 표기하였다. 당시 이 비의 제막식에는 조재천 경상북도 지사와 해군 의장대 및 100여명의 민간인이 참석했다.

그러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추정) 인해, 소실 된 것으로 알려진 이후 50여년간 아무도 관심을 가진 이들이 없어 이 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다.
경북도는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은 형태로 위령비를 다시 만들어 원래 비석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 밝혀지지 않는 진실과 여러 가지 의혹들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공식적인 이 사건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침몰된 선박이 50척이며 200명이 넘는 어부들이 사망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미 군정청의 발표보다 무려 열배나 많은 수치였다.
한편 유족들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의혹들이 규명되기를 원하고 있다.
1) 오폭의 그 배후에는 일본인들의 음모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2) 또한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위령비를 훼손한 후, 바다에 수장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3) 돼지 한마리 가격 정도의 보상가로 사건을 마무리 한 미군정의 처사를 이해 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 유족 대표 박용길씨의 증언

울진읍 온양1리 박용길씨( 년생)는 미군의 폭격으로 숨진 박춘식씨의 장남이다. 그는 현재 유가족회의 대표를 맡아 억울하게 희생된 고인들의 죽음에 대하여 국민들이 진실을 알아 주기를 원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힘겹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오늘도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 다만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군민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리고 울진에는 몇 사람이 사망했고, 우리 마을 만도 3명이 동시에 희생되었어요, 시체도 못 찾았으니 자식된 도리로 얼마나 한이 되겠어요, 바닷가에다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는 그때 희생된 분들의 제삿날이 음력 5월1일로 같아요.”

그리고 “온양리에 독도관련 추모비를 세웠으면 좋겠고요, 독도가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알도록 ‘역사문화관’을 세워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2019.10)

* 위 글은 박용길씨의 증언을 토대로 친구인 윤영익씨(부산거주)가 정리하여 제보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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