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매년 봄이 오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는 어린아이의 서투른 발걸음에서, 어린 시절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학교에 가게 되는 나를 위해서 챙이 달린 빵떡모자를 사주셨다. 그리고 노트가 귀하던 시절이라 매끈한 종이를 모아 실로 묶어주셨다. 앞가슴에는 손수건을 네모로 접어서 핀으로 꽂아도 주셨다.나는 빵떡모자에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 첫 등교를 하여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운동장에서 줄서기를 하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갯길을 지나
한겨울인 주말 오후 오랜만에 삼봉산에 올라왔다. 이름 높은 명산에 비한다면 언덕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다른 지역의 그 어느 명산보다 소중한 산이다.옛 울진의 숨은 명산이 행곡(금산), 덕구(응봉산), 근남(난두산), 덕신(성중산), 울진(삼봉산) 등이 있다. 이러한 명산들을 넘는 울진의 옛길도 보배스럽다. 그 길은 “십이령 옛길”, “고초령 옛길”, “구슬령(주령) 옛길”이다. 그 중에 십이령길은 고대부터 경북도 내륙지방과 울진을 연결한 주요 교통로였다고 한다.삼봉산에 오르면, 나무들은 힘을 얻어 키가 커지고, 줄기도 굵어
내게서 새봄은 언제나 달력을 넘기는 손끝에서 먼저 느껴진다. 넘겨놓고 바라보면 가슴에 실바람이 스치는 흔들림에 아까운 생각, 놓쳐버린 그 짧지 않은 시간에 대한 후회가 따르는 듯하다.새해 들어 정초의 각오와 다짐이 새봄부터가 아니던가. 언제까지나 꿈지럭대고 미루기만 할 수는 없는 일, 봄이 시작되니 새 기분으로 밝은 마음으로 상쾌한 발길로 출근하고 싶다.밝은 하루를 충실한 시간으로 그렇게 날마다의 의미를 소중히 하고 싶다. 콧잔등에 간지럼 태우는 봄비의 촉감, 꽃집 앞에 내어놓은 버들개지도 한 번 더 돌아보고, TV 화면의 아롱점박
어떤 이는 혼자일 수도, 또 누군가는 함께일 수도 있는 겨울밤, 누군가로 인해 설레이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미워하다 못해 원망할 수도 있는 ‘사랑’에 관한 감정들…. 그리고 따뜻할 수도 차갑고 시릴 수도 있을 겨울밤에 책 읽기에 좋은 시간이다.하루의 번잡스러움이 모두 가시고 적당한 피로와 휴식을 맛볼 때, 어제 읽다가 접어둔 책을 꺼내 일일연속극처럼 이어 읽는 맛은 또 다른 행복이다. 일주일 정도 책을 이어 읽느라 갈피마다 몇 개씩 접힌 흔적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매듭들이 명전(明轉)과 암전(暗轉)으로 엇갈리며 떠오른다. 요
사람에게 사계절이 주는 느낌은 다 다를 수가 있다. 봄은 무엇인가 바라고 기다리는 희망의 계절이지만,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계절이 늦가을이다. 오곡이 풍성하여 농부들이 풍년가를 부르는 계절이기도 하다.깊어가는 가을밤 저 애절한 귀뚜라미 소리에 아련한 슬픔을 아니 느낄 사람이 누구인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가을은 확실히 이별의 계절이고, 추억의 계절이기도 하다. 좀 더 깨끗하고 참되게 살았어야 했을 것을 하고 돌이켜보는 반성과 초조함은, 이제
열두달 중 上月은 10월, 개천절과 한글날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 근대사 인물인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과 외솔 최현배 선생을 통해, 우리는 한글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지구상에는 많은 민족이 살고 있고, 그들은 제각기 자기네의 말을 쓰고 있다. 그 종류는 3천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한다. 말이 있으면 이것을 기록하는 문자가 있어야 하고, 말은 있어도 문자가 없는 민족이 많다.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전 세계 문자 자료 244건, 543점으로 밝혀지고 있다. 문자가 없는 민족이 많고, 그들은
바람도 쉬어간다는 불영계곡, 서늘하고 차분한 바람과 시간이 갈수록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변해가는 주변의 모든 것이 가을이라는 계절의 단서가 된다. 집에만 머물기엔 아쉬운 계절, 소리 없이 찾아와 금세 떠나버릴 날씨란 걸 알기에 더욱 아쉽다. 사람도 자연도 모두 아름답게 무르익어가는 가을, 한나절이나마 아름다운 풍경 속에 녹아들고 싶다면, 변화하는 자연을 넉넉히 머금은 울진의 명소로 떠나 보는 게 어떨까!무성히 지나간 이파리(잎) 사이로 햇빛이 떨어지고, 걸음마다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가 가을의 정취를 돋운다. 9월의 생태 숲은 흐르는
웃음은 가정에서 행복을 꽃피우고, 직장에서 호의를 베풀어주며, 친구 사이에는 우정의 증표가 되어준다. 웃음은 지친 사람에게는 안식이요, 낙담한 사람에게는 격려이며, 슬픈 사람에게는 희망의 빛이다. 세상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자연의 묘약이기도 하다. 오랜 옛날 TV프로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것이 있어 우리를 즐겁게 한 일이 있다. 사람은 ‘일소일소, 일노일노’라고 한다. 한 번 웃으면 또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또 한 번 늙는다는 말이다. 웃어야 복이 온다는 말처럼, 웃으면 만사가 형통해질 텐데…그리고 “웃는 얼굴에 침
내게도 살아간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서로 비례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이 얻느냐에 생의 성공이 보장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얼마나 많이 상실하는가에 생의 낙오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다. 나의 얻음(得)이 남의 잃음(失)과 통하며, 남의 기억함이 나의 잊어버림과도 같아 질 수 있으니, 각자 자신에게 소용 닿는 만치의 크기로 가슴에 지녀 키우고, 아끼며, 기억하게 된다. ‘살아가는 자세’는 곧 그 사람의 삶에 대한 모습이고,
여전히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져 가고 있다. 독거노인만이 아니라 싱글족이 많아졌다. 외로움이 심화되어져 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외로움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슈가 되었다. 외로움에서 오는 후유증은 다양하고 심각하다. 각종 약물, 알코올중독, 자살, 정신질환들, 충동적 살인, 가정파탄, 심지어 교통사고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병든 사회, 불안이 깊어져 간다. 식을 줄 모르는 경쟁사회는 개인을 더 심각하게 고립시킨다. 혼자 지내는 법을 아무리 익힌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홀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나와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지난해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다. 안으로는 일상을 짓눌렀던 코로나19 팬데믹에, 제 편만 돌아보는 정치가 서민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우리 삶을 위태롭게 흔들어 편안하기보다 힘겨웠다. 밖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과, 미국과 중국의 심각한 대립으로 산업 원자재 가격이 급상승하였고, 그 여파로 고금리에 고물가 시대에 살아왔다. 사건 사고가 많았던 오랜 갈등의 역사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몇 년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으로 연약한 여성과 애꿎은 아이들이 전쟁의 피해자로 처참하게 희생당
어느새 며칠만 지나면 12월, 한 해의 끝이고 보니 조용히 뒤를 돌아봐야 하는 날이다. 임인년(壬寅年)의 마지막 달력을 제치는 심정은 아쉬울 뿐이다. 아직 밖에는 어둠이 덮여있는 시간에 서재에서 기도로 희망찬 계묘년(癸卯年)을 기도한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였다. 간밤에 바람이 불어서인지 온갖 가랑잎과 오물들이 쌓여 있었다. 아직 주위가 어둡고 고요할 때에 가로등 불빛에 빗자루를 손에 들고 터미널 정문 행길과 차고 등을 열심히 쓸었다. 그 순간 어느 소년이 자기 집 뜰 안을 쓸고 나서 지구의 일부분을 쓸었다고 한 위대한 말이 생각
나는 종종 창밖을 내다보기를 좋아한다.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창밖의 세상은 얼마나 크고 환하고 경이로운지... 창을 열면, 넓은 운동장에 무수히 찍힌 발자국과도 같은 수 많은 시간속의 나를 만난다. 바람 속에 흔들리는 나, 하늘 높이 풍선처럼 떠오르는 나, 이 세상 어디로든지 날아갈 수도 있고, 그리운 사람들은 언제라도 내 곁에 불러 모을 수도 있다. 공기처럼 가벼워진 내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도 있다. 내가 투명하니 맑은 창문이 있어 내 눈과 귀가 크고, 맑고 환하게 열린 초가을의 이 감정은 깊은 감격에 빠지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타락해 보기를 은근히 바라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환락에 흠뻑 젖어 빠져 들어가는 인생의 밑바닥은 얼마나 황홀할까 하고 철없이 그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좋은 환경에 태어나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농후한 듯하다. 흔히 성직자나 교직자의 자녀들 중에 길을 잘못 드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 데, 그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는 말이다. 너무 선한 것만 듣고 배우다 보면,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악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옛날부터 술과 여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 옆에서 ‘천자문’을 따라 읽었다. “하늘 천 따지”에 “가마솥에 누룽지” 어쨌든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천자문’부터 ‘동몽선습’을 거쳐 ‘사서삼경’에 이르기까지, 늘 그렇게 배웠다. 읽다보면 저절로 외우게 되고 뜻을 깨치게 된다. 그러니까 “문리가 트인다.”는 말은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절묘하게 배합된 당대 교육의 특산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이 학창 시절 연습장에 영어 단어를 세차게 마구 써가면서 외우는 방식과는 한참 달랐다. 읽고 또 소리 내어 읽는다. 책장이 닳으면 새 종이로 배접하고 새 끈
세상에 제일 보기싫은 사람이 거만한 사람인 줄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교만한 생각과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사람이 건방지게 구는 까닭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하룬들 편한 날이 있겠나...요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개인의 삶 뿐 아니라, 모든 일터에도 제한을 받고 있다. 더구나 나라의 왕을 뽑기 위한 선거를 앞두고 정쟁이 난무한다. 갈수록 지친 영혼들을 더 지치게 하는 것이 대선이다. 그것도 가족 사생활 캐기에 주력하고, 이를 후보자 자격론으로 이어간다. 더욱이
가을이 오면 좋은 글을 많이 쓸 줄 알았습니다. 지나간 가을들이 준 감동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의 영상일 뿐, 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써도 마지막 구절에서 완벽하게 착지를 못합니다. 붉게 물든 단풍, 계곡의 물소리, 맑고 푸른 하늘, 황금 들녘 등 모든 것들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손짓하면서, 함께 어울려 심포니 교향곡을 연주하는 데도... 많은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는 감동으로도 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림을 잘 그렸고, 연을 잘 만들었습니다. 학교
올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다소 길 것이라던 장마가 일찍 끝나자, 뙤약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보았지만, 무더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옛날 어머니께서 무더운 날이면, “오늘은 어찌나 더운지 땡볕이 낫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나는 가을을 생각합니다. 시원한 바다와 계곡이 있지만, 어느새 찾아와 더위를 밀어내고 우리의 지친 몸을 추스르며 땀을 닦아주는, 그 높고 푸른 하늘의 가을을…. 나뭇잎마다 내려앉아 노란색, 붉은색을 칠하고 있는 햇살의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에 살면서 얼마 전 서울병원에 다녀오기 위해 상경했다. 전철을 갈아타려고 왕십리역에서 내렸다. 열차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 모두 종종 걸음을 했다. 저마다 바쁜 생존경쟁을 하는 듯,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동감 넘치는 도시풍경이었다. 많은 전철역 가운데 왕십리역은 신도림역 다음으로 복잡한 역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복잡했다. 혼잡한 틈을 비집고 승강장에 다다르니, 앞서 온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줄을 선 채 전동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차가 왜 이리 빨리 안
오래 전, 그 어느 해 여름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손수건을 사려고 잡화점에 들렸다. 늘 다니던 길의 점포였지만, 그 집에서 물건을 사기는 처음이었다. 풍채가 좋은 여주인이 문을 막 열고 물건을 진열하는 중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낯익은 사람처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손수건을 산 후 돈을 내며, “오늘 장사가 잘 되기를 바래요.”라고 하였다. 저녁 퇴근길에 그 잡화점을 지나는 데, 주인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보기 좋게 포장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내주며 희색이 만면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오늘 재수가 있어 물건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