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길 울진중앙교회 원로 장로
박호길 울진중앙교회 원로 장로

가을이 오면 좋은 글을 많이 쓸 줄 알았습니다. 지나간 가을들이 준 감동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의 영상일 뿐, 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써도 마지막 구절에서 완벽하게 착지를 못합니다.

붉게 물든 단풍, 계곡의 물소리, 맑고 푸른 하늘, 황금 들녘 등 모든 것들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손짓하면서, 함께 어울려 심포니 교향곡을 연주하는 데도... 많은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는 감동으로도 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림을 잘 그렸고, 연을 잘 만들었습니다. 학교 뒷산 대밭에서 대나무를 몰래 베어다 칼로 쪼갠 뒤, 잘 다듬어 그것에다 밥풀을 묻힙니다. 그런 다음 아래에 중발을 놓고 참종이에 눌러 붙이면 방패연, 가오리연이 됩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학교 뒷동산으로 올라가 연을 날립니다. 실을 풀어주면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실을 감으면 다시 내려옵니다. 손끝으로 느껴지던 그 팽팽한 감촉을 잊을 수 없습니다. 줄을 살짝 튕기면 연은 아래로 곤두박질을 합니다. 이때 실을 적당히 풀어주다가 슬쩍 당기면 신기하게도 연은 땅을 스칠 듯 돌아서 다시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이번에는 친구들과 연싸움을 합니다. 줄을 서로 부딪치면 유리가루를 묻힌 연줄이 이깁니다. 연싸움에서 진 연은 하늘높이 날아갑니다. 연을 날린다는 것은 줄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줄을 놓으면 실이 끊어지면 연은 멀리 사라집니다. 아무리 잘 만든 연도, 잘 나는 연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갑니다.

몇 해 전 다녀 온 불영계곡이 가을마다 생각납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깊은 계곡의 가을 산이 어찌나 아름다운 지 황홀하였습니다. 카메라의 셔터만 누르면 모두가 작품이 될 듯하여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가슴이 벅차 너무나 흥분한 상태로 그 계곡을 빠져나왔고, 사진이 나오기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사진을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설레며 슬라이드를 불빛에 비춰보았습니다. ! 그런데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 모릅니다.

좋은 장면이 너무 많았던 것이, 화려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차라리 물가에 수줍게 앉아 있던 몇 잎의 낙엽이 잘 나와 그나마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1996년도에 개봉한 일포스티노라는 영화에서 우체부가 대 시인 네루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시인이 대답합니다. “해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살펴보시오!”

렇습니다. 우리들의 눈이 부족하여 시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너무 빠르고, 우리의 눈이 너무 많은 것을 보며, 우리의 머리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참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깊어가는 가을에 우리는 발걸음을 늦추고,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단 한 가지라도 마음에 품는다면 좋겠습니다.

마주친 눈길, 작은 웃음 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며 아름답게 합니다. 이 가을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좋겠습니다

 

 

울진중앙교회 원로장로 박호길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