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문화원장의 울진민담순례 3

 

주 효자의 본관은 신안(新安) 이름은 경안(景顔), 字는 여우(汝遇) 추호(追號)는 충효당(忠孝堂)이며 참봉(參奉) 세홍(世弘)의 아들로 울진인이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진실되고 조심스러웠으며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잘 섬기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다.

그가 20살 때 부친이 학질을 앓아 1년간이나 낫지 않으므로 남사고 선생에게 조언을 구하니, ‘인육(人肉)’이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왼손 중지 두 마디를 잘라 사발에 피를 받아 부친께 드리고 손가락은 구워 술과 함께 드렸는데 부친이 완쾌하였다.

이 소문이 퍼져 다른 사람들도 세 사람이나 이렇게 하여 효험을 보아 정려(旌閭)를 받았다.

또한 어느 해, 한식날에 쓸 제물을 준비하는데, 날씨가 나빠 생선을 구할 수 없었다. 어찌하나 하고 걱정만하고 있을 때, 마당의 감나무에 비둘기 여섯 마리가 그물에 걸려 있어 제물로 쓸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감응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어느 날 예순이 넘은 부친이 종기가 생기려 하자 모든 사람들이 ‘지렁이 즙‘을 써야 고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때는 겨울철이라 땅이 얼어서 지렁이를 구할 수 없었다.

주 효자는 뒤뜰에 자리를 깔고 하늘에 간절히 빌었다. 다음날 뒤뜰에 지렁이 똥이 보여 파 보았더니 지렁이 16마리를 잡을 수 있어서 즙을 만들고 부친의 종기 병을 고쳤다. 또한 모친이 팔에 종기가 나서 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주 효자는 직접 입으로 종기를 빨아내어 고치기도 하였다.
 

또한 주 효자는 15년 동안을 상복(喪服)을 입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문정왕후, 인순왕후, 명묘대왕, 의인왕후, 선묘대왕 등 나라 어른들의 상(喪) 때마다 상복을 입었다.

특히 선묘대왕(宣廟大王) 상 때는 公의 나이 73세의 노구였으나, “임금을 위하는 일 또한 집안의 일과 같이 하여야 한다”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또 1592년 임진란 때 몸이 노쇠하여 무기를 들고 나갈 수도 없고, 집안이 극도로 어려워 양식을 지원하지도 못함을 애통히 여기고, 집에서 3-4리 떨어진 구만동 산꼭대기에 축천대(祝天臺) 라는 돌단을 쌓고, “ 빨리 난을 거두어 달라” 고 하늘에 기도드렸다.

그는 매일 닭이 울 때 목욕재개하고 큰 비나 눈이 내려도 하루도 그르지 않았다. 그는 임진란이 끝날 때까지 수년간 기도하면서 조석으로 솔잎을 넣은 죽 한 그릇만 먹으니, 주위 사람들이 처음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으나, 그의 진실성에 감복하여 사람들은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라 칭송하고, ’주경안‘ 이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 효자‘라 불렀다,

언젠가 윤정(尹 錠)이라는 울진 현령이 있을 때 가뭄이 심하여 불귀사(불영사)에서 기도하기로 하고 여러 사람들이 사찰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절의 법당을 수리하고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는지라 모든 사람들이 단청을 둘러보자고 했는데, 주 효자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지 않으면 신의 감응이 오겠느냐?” 하면서, “ 머리를 들고 이리 저리 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낸 즉시 천둥 번개가 치며 농사에 흡족할 정도의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어느 날 강원감사 정구(鄭逑)가 주 효자의 집에 들려 “공은 어떻게 학업을 하였길래 지조가 이와 같이 독실하고 지극한가?” 라고 물었다 효자는 “저는 본래 지식이 없고 다만 소학(小學)을 읽었을 뿐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는 ‘소학절요’(小學切要)를 필사해 한 질을 만들고 잠시도 손에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충효 행실이 조정에 까지 알려져 조정에서는 1578년(선조11) 생시 정려(旌閭)하였다.

그는 갑인년(1614년) 2월17일 향연 79세로 고종하였다. 영조 임금은 (1748) 통덕랑사헌부지평(通德郞司憲府持平) 벼슬을 추증하는 한편, 충효당(忠孝堂)이란 호를 내렸다. 그의 행실은 삼강록(三綱綠)에 수록되었고 불천사에 모셔졌다.
 

* (출처/ 蔚珍 古文獻資料集成. 울진군지. 디지털울진문화대전)

주경안 효자는 울진읍 고성리 태생으로 예로부터 울진 충(忠)효(孝)자의 표본으로 꼽히고 있는 인물이다. 주 효자에 대한 기록은 울진군지를 비롯해 여러 문헌에 소개되어 있으나, 황해월 선생의 글이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를 간추려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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