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울진문화원장, 울진신문 집필위원)

 


깨어진 기왓장 아래 천년 숨결 잠들어

 


대왕송만이 홀로 남아 만조백관 굽어봐

마지막 인적 김씨일가, 말발굽소리 들어

 

산성에서 태어난 6남매는 첫째가 김정란(여), 둘째는 김현식(남)인데 군에가 사망. 셋째 김진태(아들), 넷째 김진선(남)인데 미혼으로 사망. 다섯째 딸인데 10세 정도에 죽었고, 여섯째가 막내인데 김옥란 할머니다. 김옥란 할머니의 4남매는 모두 산성에 살면서 결혼 했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남의 집도 지어주고 해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산성
에 들어와서도 우리 집을 손수 지으셨다고 들었어요. 산에 굵은 소나무 들이 많아서 집짓기는 쉬웠을 거 같아요. 지붕은 참나무 껍질을 벗긴 굴피로 덮었어요, 우리가 산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큰 집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밭뚝에 기왓장을 차곡 차곡 쌓아 놓은 것이 많아서 내가 할아버지에게 “우리도 기와집을 지어요?” 했더니, “할아버지는 ‘밭뚝이 무너지기 때문에 안된다’ 고 했거든요”

이렇게 산성에 정착한 김씨 일가는 김옥란 할머니가 15살 때 쯤, 큰 오빠와 할아버지는 “옥생이” 라고 하는 산성 아래 마을로 이사를 하고, 산성 현지에는 셋째 오빠(김진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 후 1950년 6.25사변이 난 다음, 빨갱이들의 은거지가 된다고 하여 산골의 외딴집들은 모두 바깥 큰 마을로 이주를 시키는 바람에, 김씨 일가는 산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을 우리 아버지가 직접 때려 부셨니더. 마음이 얼매나 아팠는지 말도 못했니더. 할아버지가 사시던 옥생이 마을도 소개대상이라 다른 마을로 모두 옮겨가서 살았는데, 집이 없어 한 집에 4가족이 모여 살기도 했지요”

당시 강제 이주 당한 가족들은 잠 잘 곳이 없어, 그냥 아는 집에 찾아들어가 뒤섞여 살았다고 했다. 낮에는 산성으로 농사일을 하러 다니면서, 밤에는 보부내 마을로 내려와 다른 가족들과 섞여서 3년 정도를 생활하였다.
“낮에 산성으로 일하러 갈 때는 순경들이 보초를 보고, 우리는 농사일 하고 그랬니더. 그러다가 6.25 전쟁 3년쯤 지나 나라가 좀 잠잠해지자, 우리 가족들은 다시 산성으로 들어가서 새로 집을 짓고 농사일을 계속했지요.”

새 집은 집이 상당히 컷다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큰 마루가 있고, 방이 연달아 3개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맨 끝에는 양식을 보관하는 도장방이 있었고, 집과 붙은 마굿간에 소도 서너마리가 늘 있었다고 했다. 산성 내에는 샘이 좋아서 물이 부족한 일도 없었고, 겨울에 샘이 얼었을 때는 집에서 약간 떨어진 아래쪽에 땅을 파고 나무통을 묻어둔 것이 있어서 물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다.

이렇게 두 번째로 산성에 들어간 김씨 일가는 약 10년정도 살았다. “ 내가 9살 때 쯤 소개돼서 나왔다가 11살 때 쯤 다시 산성으로 들어갔니더. 두 번째 집 지을 때는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을 때였지요. 그리고 내가 18살 때까지 산성에 살았니더. 그때가 아매 1960년인가 61년인가 쯤일끼라요”

김씨 일가는 이렇게 두 번째 산성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농사를 짓다가 60년대 초경에 완전히 산성을 떠나 바깥 대흥리 마을로 내려오게 된다. 산성부근에는 지금도 조상의 묘 3기가 있어 자손들이 매년 찾아가 성묘를 한다. 김옥란 할머니의 증조모 묘는 할아버지가 삼척에서 이장을 해 왔고, 할아버지 묘와 큰 오빠 묘가 있다고 했다.
“ 오빠가 일본에 갔다와서 산성에 살 때, 조용한 밤이면 말 발굽소리가 자꾸만 들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집이 계속 쿵쿵 울렸다고 했어요. 그리고 말馬이 성으로 계속 돌아다니고 훈련해서 성 밖으로 길이 패어있지요. 맨 끝에는 흙이 수북하게 쌓였는데, 말이 뛰어가다 콱 서면 흙이 패이면서 쌓이잖아요. 몇 해 전에 산소에 가보니, 그 패인 길이 그대로 있데요”

김옥란 할머니가 어릴 때 산성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산밑 십리까지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들이 커서 앞을 가로 막아있지만 조망거리는 멀다. 산성에서 바라보면 죽변 등대가 잘 보였다고 한다.
“ 옛날에 성城을 지켜주는 할머니가 있었대요, 매일 저녁 임금에게 ‘장수들이 안오니 편히자라‘ 고 말해주어서 임금이 편히 잤다고 해요. 그리고 군대들이 많았던가 봐요. 성안에 집을 지을 때 한 줄로 서서 기왓장을 옮겼다고 했어요, 그래서 군대들이 먹는 쌀이 얼매나 많은지 쌀 씻은 뜨물이 저 아래 불영사 밑에 하원까지 40리를 내려갔다고 들었어요 . 그리고 산성에는 불개미가 많아서 김씨 아니면 살지 못한대요. 통고산을 임금이 쫒겨가다 신세타령하면서 울고 넘었다고 해서 통곡산이라 했다는 얘기도 어른들한테 많이 들었지요”‘

김옥란 할머니는 울진에 사시는 분으로 산성에서 거주했던 분들 중에 가장 연장자시며, 기억력이 매우 좋으시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시는 분이었다. 지금도 건강이 좋아 직접 산에 올라 송이 채취를 한다고 하였다.

 

󰁾김분남씨의 이야기 (1953년생 울진 읍내리 거주)

김분남씨의 부친은 산성에서 살았던 김씨 일가의 셋째 아들인 김진태씨이다. 부친인 김진태 씨는 62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김분남씨는 김진태씨의 둘째 딸로 산성에서 태어났다. 모두 8남매였는데, 첫째 언니는 김분선으로 50년생이며, 울진 읍내리에 사시다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지금은 여동생 두 명이 울진에 살고 있고, 끝으로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객지에 나가 살고 있다.

김씨 일가 중 가장 연장자인 고모님이 소광리 장군터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고모님이 바로 김옥란씨이다. 김분남씨는 두 살 때 산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고, 어른이 되어 이웃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 뿐이라고 하였다.
“ 우리 집이 산성에 살 때 누에를 많이 쳤다고 해요. 지금도 뽕나무가 큰 게 있습디다만, 누에치고 약초도 캐고 농사짓고 이렇게 살았지요.”

김분남씨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선조 할아버지가 삼척에서 사시다가 울진으로 이사를 와서 소광리 ‘옥생이’ 라는 마을에 정착을 했다고 한다. 옥생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웠던 모양으로 다시 산성으로 올라가서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산성은 깊은 산중이라 일년 내내 쌀은 구경할 수 없고 좁쌀과 감자가 주식이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부친이 손재주가 좋아 목수 일을 잘 하였기 때문에 손수 집을 지었다고 들었다.

“나는 산성에서 태어났고 두 살 때 가족 모두 대흥리로 이사를 왔어요. 산성에 살 때는 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조, 감자, 약초를 캐서 생활했다고 해요. 집은 아버지가 직접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지었고요. 참나무 껍질을 벗겨서 덮었어요. 그리고 산성안에는 우물이 한개 있었는데 샘물이 좋았어요. 그 높은 산중에 어떻게 샘물이 그렇게 잘 나는지 모르겠어요“
산성 내에는 샘물이 있어 식수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깊은 산중이라 집을 찾아오기가 힘들었지만, 집도 크고 농사도 잘되었고, 땅이 많아 양식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특히 좋은 약초가 많아 시장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김분남씨는 두 살 때 대흥리라는 이웃 마을로 가족들이 모두 이사를 와서 살다가 19살 때 신림리로 시집을 갔다. 결혼 한 후에도 형제들과 함께 산성에 자주 가보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조상의 산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성은 비록 가파르고 거리가 멀지만, 어릴 때 자라던 추억들이 남아있어 힘들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다.
“ 그때 우리 가족들은 참 고생을 많이 한 거 같애요. 그 먼거리를 농사를 지어서 장에 내다 팔고 밤늦게 산중으로 다시 돌아오고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산성에는 우리가 살다 나온 후에 집이 비어있을 때, 신림에 살던 김 모씨라는 분이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살다가 나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성씨들은 못살아요. 불개미가 어찌나 많은 지, 개미집이 무덤같이 둥그렇게 커요. 다른 성씨가 와 살면 이 불개미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사람을 막 문다고 해요. 김씨만 안물고.”

 

󰁾서운봉씨의 이야기(1942년생. 울진 읍내10길 거주)

서운봉씨는 35세까지 안일왕 산성 밑에 있는 ‘보부천’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안일왕 산성은 800고지였으나, 산성에 사는 분들과 같은 마을주민이라 늘 농삿일도 도와주며 살았다. 집단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서로 합심해서 일을 했고, 벌채같은 큰 일거리가 생겨도 함께 일하러 다녔다. 그래서 산 위에 사는 것과 산 아래 사는 것이 다를 뿐 한 마을 주민이었다.

서운봉씨는 1970년대 중반에 자녀학교 문제로 산촌 생활을 정리하고, 울진 읍내리로 이사를 왔다. 그가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산성의 명칭은 ‘안일왕산성’ 이 아니라 ‘ 애밀왕 산성’ 이었다.
“ 내가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지요. 아이가 울면 ‘애밀왕 온다’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해요. 아마 애밀왕이 매우 무서운 사람으로 소문 났었던 거 같애요”
“ 내가 듣기로는 애밀왕이 산성에 살았는데, 산성 바위에 장군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 데, 그 그림이 다른 사람한테 발각 돼서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합디다. 그래서 안일왕이 쫒겨서 왕피리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성안에는 김씨네가 끝까지 살았는 데, 성 주변에 비탈 밭들이 많았니더. 그런데 땅이 좋아서 곡식이 너무 잘 되었지요, 특히 감자 농사가 아주 잘되었어요. 그리고 그 집에 식구들이 많아서 집이 참 컷니더.”

산성내에 살던 김씨 일가가 살기 전에는 큰 기와집들이 있었다. 어릴 때 기와를 많이 보았다고 하며 많은 군사들이 살았다고 들었다고 한다.
“ 내가 어른들한테 여러 번 들었는데요. 여기 집을 지을 때, 기왓장을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서 전달 전달해서 옮겼다고 해요. 군대들이 밥을 해먹을 때 쌀 씻은 물이 저 아래 보부천 까지 뿌옇게 흘렀다고 했어요. 보부천은 하원마을 앞으로 흘러가지요. 그리고 이 성안에는 김씨가 아니면 못산다고 해요 ,불개미가 얼마나 많은지 계속 물어서 다른 성씨들은 살지 못한다고 했어요.”

 

󰁾맺는 말

안일왕 산성의 북쪽 칼날같은 능선에는 대왕송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가지와 비틀어진 몸둥아리가 몇백년 동안 매서운 칼바람과 맞서 이기고 있음에 마음까지 숙연해 진다.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과연 ‘대왕송’ 이란 이름이 참으로 적합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왕송 아래의 산성터에는 무너진 돌무더기가 군데 군데 지저분하게 쌓여있고, 크고 작은 잡목들이 집터를 덮고 있어 지금은 옛 성터의 흔적이 거의 소실되었다.
그러나 먼 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서장대의 망루와 회곽도가 밀림사이로 뚜렷이 남아있어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고대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

<참고문헌> -『大東地誌』,『新增 東國輿地勝覽』,『東國輿地志』,『울진의 얼』,『蔚珍郡誌』,『國譯 蔚珍 舊 郡誌』,『울진군 城址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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