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삼간의 행복 39

<범상칼럼>

 

인간은 말과 글로서 생각을 전달하고 공유한다. 그래서 예전 한국인들은 따뜻한 아랫목이라고 하면, 그와 연관하는 사건들을 떠올리고 동질의 정서를 느낀다. 그러나 불[]이라 말해도 입이 뜨겁지 않고, 불이라는 글자를 수십만 장을 써서 책으로 묶어도 종이가 타지 않는다.

하지만 매실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침이 고이지 않는가! 불교학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해 말과 글은 진리인가 아닌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말과 글은 진리(승의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진리를 설명하는 세속제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좀 더 나아가서 내리지 않는 비[]’는 없으니, ‘비가 내리다는 말은 옳은가? 땔감으로 준비해 놓은 나무를 장작이라 한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다른 용도로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불이 붙기 전까지는 장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가? 등의 논쟁들이 있다.

중국 철학에서 백마비마(白馬非馬)론으로 대표되는 명가(名家) 학파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개념에 있어 백마라고 할 때, ‘백마는 여러 색깔의 말들 중에서 흰색 털을 가진 말을 지칭함으로 이라고 하는 통칭의 개념에 비해 외연이 좁다며, 언어가 형성하는 개념 등을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어떻든 간에 언어는 같은 경험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 동질성의 개념과 정서를 형성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서 예전 한국인들은 아랫목에 대한 동질성의 정서가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연유이다.

현재 우리 생활에 있어 온돌’ ‘구들이라는 단어보다는 한옥의 아궁이에 해당하는 보일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로인해 방바닥을 덥히는 단순기계에 불과한 외래어 보일러구들’ ‘온돌’ ‘아궁이’ ‘아랫목’ ‘윗목’ ‘군불등의 말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한국인의 정서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의 구조가 변하면서 사랑방, 안방, 건넌방, 대청, 부엌 등은 침실, 거실, 주방, 베란다 등으로 대치되었고, 마당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나 버릇이 없다(나무라기보다는 어른인) 자신을 책망하는 글귀가 있다고 한다. 이 같은 노파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러나 정도를 따진다면 이해 불가능 또는 체념에 이르고 있는 현재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기계문명 이전에는 삶의 방식이 거의 바뀌지 않았음으로 단순히 젊음의 지나친 열기를 걱정했다면, 현대사회는 부모자식 간에도 달라도 너무 달라 포기에 가까운 정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주거환경으로 한 가족 안에서도 아랫목을 경험한 예전 한국인과, 태어 날 때부터 보일러를 사용하는 요즘 한국인이 공존한다. 이것은 서로 말(정서)이 안 통하는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여러 번에 걸쳐 한국인들의 정()은 따뜻한 온돌에서 몸을 부비며 생활하면서 느끼는 피붙이 살붙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했다. 여기에 아랫목은 우리들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보태보려 한다.

기본적으로 따뜻한 아랫목은 집안의 노약자인 어른과 아이들이 차지하는 반면, 불기운이 적게 닿아 서늘한 윗목은 젊은이들의 자리이다. 하지만 추운 바깥에서 놀다온 형들은 손을 녹이고, 일하고 들어온 어른들께 잠시자리를 내어주며 배려와 공경의 예의를 배우는 공간이 된다. 때늦은 집주인의 밥그릇을 아랫목에 묻을 때면 며느리는 남편사랑이요, 시어른들은 자식걱정이요, 아이들은 어른들의 공경이니 잘 씻지 못해 고린내 나는 발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던 쿰쿰한 아랫목 이불 밑은 말과 글로는 가르칠 수 없는 교육의 장이며 화합과 정이 넘치는 학교였다.

이 같은 아랫목이 사라지면서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함에도 예전의 한국인들은 보일러와 침대에 사는 요즘 한국인들에 대한 노파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음에 안타까워하며, 급변하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통할지를 고민하며 이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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