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칼럼/ 초가삼간의 행복 43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규칙과 질서 즉, 기준이 있어야한다. 규칙과 질서에 타율적강제성이 부여될 때 법()이라 하고, 자율적강제성으로 통제되는 것은 도덕적 규범이라 한다. 이때 도덕적 규범이 요구하는 자율적강제성은 법이 규정하는 처벌과는 다른 사회적 압박으로서의 강제성이다.

 

예의는 도덕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엄청난 구속력을 가지며, 때로는 처벌이 따르는 법 이상의 불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직장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몹쓸 사람)으로 취급되면, 삶이라는 인생자체가 황폐해 지기 때문이다.

 

예의는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국가의식이나 의전을 제외한 일상에서는 치덕작(齒德爵)이라 하여 나이(), 인격(), 지위()를 기준으로 하며, 절대적 구분을 가지는 나이를 으뜸으로 한다. 그래서 어떤 시비가 일어나면 엉뚱하게도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너 몇 살이냐로 시작하여, (손아래 사람의 주장이 옳더라도) “어린사람이 해도 너무하다또는 어린 사람이 참아라는 구경꾼들의 연장자 편들기라는 이상한 판가름으로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보인다.

 

전통적으로 나이 관계는 예기의 곡례편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살펴보면 나이가 자기의 갑절이 되면 아비의 예로 섬기고, 10년 연상이면 형으로 받들고, 5년 위이면 견수(肩隨-어깨를 나란히 하되, 조금 뒤쳐져 따름) 하며, 5인 이상 무리를 지어 있을 때는 장자(長者)는 반드시 자리를 달리해 앉는다하였다. 이때 아비의 예로 섬겨야 한다는 갑절의 나이기준은 관례를 올리는 20세를 말함으로 자신보다 20살 이상이면, 부모의 벗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5인 이상 무리를 지었을 때 장자(長者)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라는 것은 비록 터놓고 지내는 막역한 또래관계 일지라도 나름의 위계질서를 지킴으로서, 또래집단의 일시적 충동으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회규범을 벗어나는 악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상대의 나이가 20살 이상이면 부모와 같은 존자(尊者)로 모시고, 10살 위로는 장자(長者)로서 형님으로 받들며, 5년 이상 9년 까지는 견수로서 쫓아 따르며, 4년까지 연장자, 동갑, 4년 연하자는 함께 터놓고 지내는 평교(平交)의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근거로 아래 위 10살 정도는 친구처럼 지내도 허물이 없었고, 현재는 객지 벗 10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것 같다. 아마도 이 같은 폭넓은 교류는 사대부들에게는 학문의 논의의 장으로서 같은 세대를 아우르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농경이나 토목 등의 울력에 있어 서로의 소통과 긴밀 협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제는 막역지우의 평교와 견수 가능한 나이 폭이 넓다보니 서너 살 터울의 형제간과 때로는 부모와 자식의 친구가 겹치는 일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왕래가 적은 타향에서 어떤 사람과 아버지가 9년 연하로서 서로 친구관계를 맺고 아들은 9년 연상으로서 친구가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는 자식이 친구관계를 거두고 당연히 부모와 같은 부사(父事)로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3형제는 벗을 하지 못한다는 원칙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집에 삼형제가 있는데 백형(伯兄)4살 아래인 갑돌이와 평교관계를 맺었을 때 갑돌이는 셋째 동생과 동갑일 경우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백형과 중형(仲兄)갑돌이와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정작 갑돌이와 동갑인 셋째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셋째와 갑돌이는 동갑 이기는 하지만 서로 맞존경의 예의로 대해야 하고 친구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외동아들 외동딸들이 넘쳐나는 요즘 형제마저 없어지고, 친족관계도 희미해져서 이 같은 연치(年齒)의 위계질서는 사라진 듯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은 위와 같은 기준은 필요하며 이러한 예법을 잘 이해하고 처신한다면, 예의바른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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