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스님
범상스님

‘사물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는 견색명심(見色明心)이라는 말이 있다. 견색(見色)이란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하고, 명심(明心)은 견색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 ‘얼음녹아 물이 되고, 물이 얼어 얼음 되듯’ 일체만물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연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가립(假立)의 존재들임을 알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그러나 견색이 있은 연후에 명심이 따른다. 실체의 궁극에 가서는 색(色)이 허망하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 강을 건너는 데 배가 용이하듯 말이다.

일반적으로 색(色)을 물질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물질 역시 마음에 포섭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으로 ‘단단하고 무르고의 <견고성>’, ‘건조하고 축축한 <습윤성>’, ‘따뜻하고 차가운 <온난성>’, ‘움직이는 성질의 <유동성>’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마음이 알아차려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근거로 색은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에 인지되는(마음)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인간과 다른 감각기관을 가진 동물은 사물을 다르게 느낀다.-같은 사과를 할머니는 ‘시다’하고, 손주는 ‘달다’ 하듯이 결코 색을 물질이라고 확언지어 규정할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은 견색을 통해 마음을 일으킨다. 울진군이 ‘대한민국의 숨’이라는 색(色)을 통해 ‘탄소중립 녹색성장’이라는 군정목표를 나타내려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결혼의 증표로 반지를 주고받고, 길거리에 지방특산품 모형을 세워 널리 알리고, 입춘 날 대문에 입춘방을 붙이고, 새해 덕담 등 인간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색을 이용해야만 소통이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오해에 빠져있다. 살펴보았듯이 ①색은 외부에 실재하고 자신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에 ②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착각은 인류문화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예를 들어 신(神)이 있어 인간사를 주관한다면, 세상의 모든 불평등은 왜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고지선(至高至善)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신이 무슨 심보로 인간의 믿음을 담보로 상과 벌을 준다는 말인가. 이렇게 불합리한 존재를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은 누구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적으로 입춘 날 대문에 입춘방을 붙이고, 부적을 받아 지닌다. 필자도 입춘방을 쓰고 때에 따라 부적을 써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공표하기 위해 같은 옷을 입는다거나, 결혼의 증표로 반지를 나눠 끼듯이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일상에서 입춘방을 볼 때마다 좋은 기운을 생각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부적을 지님으로서 자동차를 탈 때 안전벨트를 매고 규정 속도를 지키듯이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신(神)이나 부적 등에 영험한 기운이 있어서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은 그야 말로 미신이다. 그러나 책상머리에 붙여 놓은 좌우명으로 마음을 다져가며 성공에 이르듯, 색(色)을 통해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과로 삶이 달라질 때, 비로소 행복에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외부 대상에 영험이 있다는 착각으로 기도를 해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그곳에 집중함으로 나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이 같은 경험은 허상에 더욱 매달리게 만든다. 마치 광신도나 노름꾼이 한 번의 경험에 빠져 인생을 망치듯이... 이렇게 되면 자신의 변화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 역시 개선되지 않음으로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올해는 청룡의 해라고 난리가 났다. 오죽 했으면 ‘황금돼지의 해’ 에는 출산율이 높았다고 하니, 색(色)의 힘은 참으로 크다. 새해는 덕담, 기도, 재수 등등 색(色)의 힘이 위력을 떨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색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동기로서 효험이 있다. 우리 독자들 모두 견색명심(見色明心)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 행복에 이르는 한 해가 되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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