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범상스님
범상스님

우리 선조들은 자연, 그 중에서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왔다. 농사는 해(태양)가 기준이 됨으로 24절기로 구분하였고, 사람의 생체는 달의 영향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매일 달라지는 모양으로 날짜를 가늠할 수 있어 음력은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이러한 고려 없이 한때 음력은 무언가 부족하고 잘못된 것인 양 취급되었고, 일방적으로 모든 기준을 양력 중심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동지를 ‘버금가는 설날’ 이라는 뜻으로 아세(亞歲)라 하고, 양력 1월 1일은 해는 바뀌었지만 대충 그렇게 넘어가고, 당연한 듯 음력설을 쇤다. 여기에 바다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영등사리(음력 2월)에 본격적 새해를 시작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언제가 새해인지 그야말로 어정쩡하게 맞이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부터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까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기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싶다. 묵은 해를 보내는 송구(送舊)는 한 해를 되돌아보고 부족함을 살피는 것이요, 영신(迎新)은 매일매일 새롭고 또 새로워지겠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으로서의 희망이라 하겠다.

일신우일신의 실천 성공률은 열에 하나가 되지 못할 만큼 희박하다. 비근한 예로 새해마다 철석같은 각오로 다짐하는 금연, 금주, 독서, 살빼기 등의 약속을 지켜내는 비율이 10%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을 적게 먹으면 될 일인데 얼마나 어려우면 다이어트산업이 성황을 이루겠는가. 이러한 현상을 이성의 뇌와 본성의 뇌로 설명한다. 본성의 뇌는 이성의 뇌 보다 다섯 배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밥상에 앉을 때까지 이성의 뇌는 음식을 절제하겠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막상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본성의 뇌가 강력한 힘으로 이성의 의지를 꺾음으로 번번이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생활습관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오죽하면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본성의 뇌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로 한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그렇다고 일신우일신의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콩나물은 물이 밑으로 몽땅 빠지는 시루에서도 잘 자란다. 마치 콩나물을 키우듯 하루에도 수없이 다짐을 이어나가가야 한다.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반드시 동쪽으로 쓰러질 테니 말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 마다 ‘반갑습니다’ 라는 인사말의 의미를 새기는 것으로 일신우일신을 실천하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인간사는 우주 유일의 내가 나를 제외한 우주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속적관계이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는 ‘반값[半値]’ 이라는 명사에 ‘-습니다’ 라는 종결어미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과 숨 쉬는 공기의 값은 같다. 이처럼 ‘반갑습니다’는 선후(先後)의 관계는 있을지언정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와 공기와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꿰뚫는 통찰의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것은 유일의 ‘자기 값’이 있고, ‘자신의 값’이 ‘상대의 값’ 보다 높다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상대에 따라 갑을관계가 형성되듯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상황마다 값과 역할이 달라진다.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 아들에게는 아버지, 부인에게는 남편...이처럼 고정되고 정해진 값은 없다.

따라서 ‘반갑습니다’ 하는 인사를 건 낼 때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반값으로 존재합니다. 당신을 통해서 온전한 값을 가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과 행동이 반복되면, 자신은 물론 점차 주변과 주변인들이 선(善)한 관계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앞서 말한 것처럼 ‘우주 유일의 내가 나를 제외한 우주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사가 술술 풀림’을 말하는 것이다.

맞이하는 갑진년 새해 만나는 상대 모두가 자신의 반쪽임을 깨닫는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를 통해, 하루하루 일신우일신의 행복이 이어지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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