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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ㆍ시사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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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눈깔 지가깠어....

작성자
또라이
등록일
2010-03-21 11:17:03
조회수
2190
262회] 영남 출신의 후계자 물색후광 김대중 평전/[34장] 퇴임 뒤에도 왕성한 활동 2010/03/20 08:00 by 김삼웅 권력자는 누구나 후계자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절대왕조 시대는 물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보장된 민주주의국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후계자를 통해 왕조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김대중은 임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후계자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50년 만에 민주개혁 진영에서 집권하여 추진해온 민주화와 남북화해협력 체제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후임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동교동계 가신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방안은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선 가능성 때문에 배제되었다. 다음의 선택지는 여권의 중진 가운데서 찾았다. 영남 출신이라야 당선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영남 출신 후보를 내세워 호남의 지지를 이끌어내면 얼마든지 당선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김대중의 심중에는 정치인은 스스로 성장해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이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후광을 입게 되면 그 그늘에 가리게 된다는 인식이었다. 김대중은 2001년 가을, “여권의 차기 지도자감으로 어떤 유형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느냐”라는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다소 일반론인 듯 하나 속내의 일단을 보여준다. 차기 지도자의 덕목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우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세계 인류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지식기반 경제와 남북화해협력에 대한 비전과 소신도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선거는 이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선 가능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당원들이 참작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가장 애당적인지 누가 가장 우리 당의 비전을 잘 성취해 나갈 수 있는 인물인지 매일매일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의 총재로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최대한 공정하게 차기후보 선출을 관리해 나갈 것입니다. (주석 1) 가능성이 있는 인사들에게는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다는 원칙이었다. 김대중의 ‘의중’에 있던 후계구도의 인물 군에는 김중권ㆍ노무현ㆍ이수성이 선두그룹이었다. 모두 영남 출신이다. 김중권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국민의 정부’ 출범에 기여하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 출마 했지만 고향인 경북 울진에서 16표 차로 낙선되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그를 불러 민주당 최고위원에 나서도록 하고,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아 전당대회에서 3위로 당선되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비서관에 발탁되어 김대중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했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후계문제에 있어 DJ가 우선 고려했던 것은 △ 영호남에서 고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따라서 당선 가능성에 높은 동서화합형이어야 하고 △ 자신의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는 신뢰감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김중권을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 같다. (주석 2) 김대중이 정부를 출범하면서 눈여겨 봐왔던 인물 중의 하나가 경북 출신의 전 국무총리 이수성이었다. 평민당 총재시절 그의 아우 이수인을 전남 영광ㆍ함평 보궐선거에 공천하고 현지에 내려가 여러 날 머무르면서 ‘지역정서’를 극복하고 당선시킨 인연도 있었다. 김대중은 이수성에게 평통자문회의 부의장을 맡겼다. 의장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부의장이 실제 최고책임자다. 평통자문회의는 전국적인 유력인사들의 조직망을 갖고 있어서 이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고 통일문제에 비전을 제시하면 얼마든지 후계구도에 떠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김대중이 정치인 중에서 오래 전부터 지켜보아 온 인물이 노무현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지역감정의 벽에 도전하고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의 왜곡에 맞서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 왔다.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당성이 있다고 지지 발언도 했다. 낙선할 것이 분명한 데도 안전한 서울 지역구를 두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자기희생’은 보통 정치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초년 변호사 시절부터 항상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왔다. 5공청산 청문회에서도 발군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김대중은 2000년 8월 그를 해양수산부장관에 기용했다. 노무현은 2001년 3월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나 민주당 대선후보에 나서고, 2002년 3월 광주경선에서 예상을 뛰어넘어 이인제를 물리치고 1위를 차지함으로써 대권 경선가도에 파란불이 켜졌다. 호남 대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김대중의 ‘비호남 영남출신’후계구도는 노무현으로 낙착되었다. 노무현이 후보가 되기까지에는 그 자신 정도를 당당하게 걸어온 정치인의 용기와 투지, 민주개혁 정권을 유지하려는 대의원들의 ‘당선가능성 후보’에 대한 선호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었다. 노무현은 2002년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실시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1만 7568표를 얻어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6ㆍ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참패함으로써 내부에서 대통령후보 재신임, 지도부 인책, 제2쇄신 등 문제로 갈등ㆍ분열현상이 나타나고, 8ㆍ8 재보선에서 13개 지역 중 11개 지역을 한나라당에 빼앗기면서 신당 창당론과 대통령후보직 사퇴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11월 24~25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실시한 <국민통합21> 정몽준 총재와 벌인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면서, 마지막 돌파구를 넘었지만, 투표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밤 정몽준이 지지철회를 선언하여 다시 한번 위기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막판 악재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48.5% 득표율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대중의 입장에서는 심중으로 가장 만족할만한 후계자가 당선된 셈이다. 주석 1) <당적이탈, 거국내각 생각해본 적 없다>, <신동아>, 2001년 11월호, 79쪽. 2)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김대중정권의 흥망>, 36쪽, 나남출판, 2005. 김대중의 후계구도, 김중권, 노무현, 이수성 엮인글 : 댓글 (1) : 추천 : 스크랩 : 인쇄 엮인글 주소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rmfdurrl/324109 fwe 2010/03/20 23:18 수정 | 삭제 | 댓글 ━━두명이서 노예 해드립니다.
작성일:2010-03-21 11: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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