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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김대중/ 당신의 고마움을 모르는…

작성자
바람
등록일
2011-06-22 10:45:55
조회수
2329

당신의 고마움을 모르는…
[김대중을 생각한다 31] 미국과 김대중

(프레시안 / 브루스 커밍스 / 2011-06-21)


2011년 상반기 최대 뉴스는 ‘아랍의 봄’이었다. 대부분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리비아, 시리아, 예멘, 바레인과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에서까지(사우디 시위대는 겨우 한 줌이었고, 신속히 진압되긴 했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이를 지켜보면서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군사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수 십 년에 걸쳐 펼쳐온, 1987년 6월 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1945년 이후 진정한 야당 출신의 최초의 대통령인 김대중을 기억할 것이다.

1997년 김대중의 당선으로 정점에 도달한 민주주의로의 이행, 그리고 그의 재임기간 동안 이룩한 개혁조치들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안정적이고 약동적이며 광범위한 기반을 갖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1995년 독재자 전두환과 그의 후계자 노태우에게 내려진 엄중한 처벌, 그리고 (특히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수행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조사들을 종합해보면, 지난 30년간 세계에서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대한민국처럼 성공적으로 이룬 경우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랍의 봄’을 다룬 미국의 뉴스와 논평에서 한국의 경험을 언급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국의 독재 종식 또한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일어난 민주 정권들의 부상과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졌는데도, ‘아랍의 봄’의 역사적 선례로 인용되는 것은 언제나 동유럽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공화당, 민주당을 막론하고 대다수 미국 전문가들과 정책결정자들이 김대중과 그의 계승자 노무현을 신뢰하지 않았고, 나아가 옛 독재자들과 그 현재의 후계자 이명박 대통령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미국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김대중은 언제나 매우 친미적이었고, 망명도 미국으로 갔으며, 자신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관심 있는 미국인들의 도움을 구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대중과 비교하면 국내에서 성장한 민주주의자였다. 그의 경우, 한국의 거리가 반미주의로 가득했던 1980년대 변호사로서 반정부 인사들을 변호하며 활동했던 경험이 아마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좀 더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기울게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1945년 이후 한국에서 언제나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방어해 온 미국이, 막상 진짜 민주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여전히 이상한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과 미국의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토론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성과 두 개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필자와 그가 쌓은 개인적 친분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이다.


소란스러운 한국인들과 불평쟁이 미국인들

필자가 40년도 더 전에 서울의 한 다방에 앉아 곧바로 깨닫게 된 한국의 신기한 점 중 하나는, 과시적으로까지 보이는 비판적 정치 문화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박정희가 얼마나 멍청한지 떠들고도 감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만약 조용히 말했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또 멍청이라고 불렀던 윤보선 전 대통령은 뻔뻔한 대지주이며 자기 혼자 떠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나, 백두진 전 국회의장은 워커힐 호텔에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그의 저택을 보면 알 수 있듯 탐욕스럽고 부패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정치적 가십은 끝도 없이 쓸 수 있다. 한국인들은 마치 미국인들이 영화배우에 열광하는 것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정치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1990년대 내내 ‘3김’은 신문 1면의 단골이었다. 마치 안젤리나 졸리의 얼굴이 미국 슈퍼마켓에서 파는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것과 비슷할 만큼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과잉 활성화된 정치 문화와 5년 단임제라는 대통령 임기가 합쳐지면, 한국의 대통령이 취임 후 청와대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이미 인기를 잃기 시작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반면 미국은 지난 2세기 동안 안정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지해 왔다. 미국 정치는 보통 미국의 일반 국민들과는 상관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평균적으로 지난 50년 동안 겨우 반을 조금 넘기는 유권자들만이 대선 투표에 참여했다. 지난 10년 동안 떠오른 인터넷 블로그 문화는 생생한 토론으로 미국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긴 했지만, 대부분의 토론은 좁은 범위 안에서만 이뤄졌다. 예를 들면 공화당은 감세를 바라고, 민주당은 정부의 더 많은 규제와 재정 지출을 원한다는 것 등이다.

한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미국 정치의 많은 부분은 정신이상자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바마가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나, 오바마가 미국을 ‘사회주의’로 몰아간다고 생각하는 뉴트 깅리치, 새러 페일린 같은 대선 후보들 말이다. 대부분 중년 이상의 백인들인 ‘티파티’ 지지자들은 그들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때로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에게 미국 이외의 다른 세계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추상의 영역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엔이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비밀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점만큼은 굳게 믿고 있다.

한국에 공식 파견된 미국 사절단(대사관 직원이나 주한미군 등)들은 물론 좀 더 유식하긴 하다. 하지만, 필자는 1967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처음 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 한국에 파견된 미국인들로부터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이란, 그들이 한국인들을 얼마나 낮춰 보고 있는지, 한국인들이 민주주의에 준비돼 있지 않다고 얼마나 자주 말하고 있는지, 박정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찬사를 보내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리처드 스나이더 전 미국 대사는 필자에게 “박정희는 터프해. 정말로 터프하단 말이야”라면서, 자신이 박 대통령과의 골프를 얼마나 즐겼는지 이야기했다.

필자는 서울에 주재한 미국 관리들과의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을 진정 떨칠 수 없다. 이 미국인들은 우락부락한 군 관계자들로부터 신경질적인 외교 관계자들, 국제개발처(USAID) 관계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언제나 북한의 공격에 대해 경고하는 완고한 반공주의자들에서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를 한탄하는 민간인 자유주의자들까지를 포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거의 대부분은 이태원 근처 용산기지 안에 살았고, 자유주의자들까지 포함해 모두가 한국인들에 대해 불평하면서 생색을 내거나,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드러내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한국인들과 함께 살고 한국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었던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한국인들이 (미국의 감독이 없는 한) 어떤 옳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감히 한국인들의 삶의 현장으로 나가려고(ventured out into "the economy")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지 밖으로 나갈 때면 관용차를 타거나, 운전사가 기지 정문에서 신분증을 보여 줘야 기지 안으로 승객을 태우러 들어올 수 있는, 일명 ‘김치 캡’이라고 불리던 한국 택시를 탔다. 하지만, 그 몇 년 후와 비교하면, 서울은 당시에 정치적으로 훨씬 더 유쾌한 장소였다.

현재 한국 정책에 관여하는 많은 미국인들은 1980년대를 충분히 경험했을 나이다. 당시 서울은 완전히 무장한 병영이었다. 철창 덮인 창문이 달린 버스 수백 대는 폭동 진압 경찰로 채워져 있었고, 탱크 같은 검은 마리아[페퍼포그]는 측면에 뚫린 무수한 구멍으로 최루가스를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낸 사람은 최루가스를 독점적으로 생산한 여성 기업인이었다) 전두환은 준(準)군사 조직인 폭동 진압 경찰[전투경찰]을 크게 늘렸고, 1980년대 중반 전경은 15만 명에 달했다.

전경들은 시위 진압의 선봉에 섰으며, 기괴한 보호 장구를 착용했다. 얼굴 전체를 꽉 조이는 검은 헬멧과 목 뒷부분을 보호하는 가죽 보호대, 누빈 옷, 두꺼운 팔꿈치·무릎·정강이 보호대, 무거운 전투화, 왼손에 든 긴 금속제 방패, 오른손에 든 폭동 진압용 곤봉, 철망으로 된 마스크 등이다. 그들이 전경 버스에 앉아 다음 교전을 기다리는 모습은 서울 중심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그의 이른바 ‘반미주의’였다. 그들은 용산기지의 서울 밖 이전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반환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요구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시기의 한국인들이 1980년대에 비해 미국에 대해 더 비판적이 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그들의 지도자들조차 비판 여론의 눈치를 보게 하는, 시끌벅적하고 서로 잘난 체하는 민주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관점을 좀 더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일 뿐인가?

수십 년 동안의 군사 독재 기간에는 공공연히 미군 철수를 주장하기만 해도 곧바로 감옥행이었다. 그러나 1997년 이후에는 그 불행하고 억압받던 과거가 업보가 되어 돌아왔다. 최근 수십 년간 한국의 대통령과 재벌 총수, 대학 교수, 군사 독재자들이 한국 보통사람들의 술자리 안줏감이 된 것처럼 미국인들도 같은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1985년 2월 이런 와중에 김대중은 귀국했다. 필자는 망명지인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그와 동행한 미국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대표단의 동행은 2년 전 필리핀으로 돌아오려다 귀국 즉시 마닐라 공항의 활주로에서 살해된 베니그노 아키노의 경우와 같은 일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만큼은 영리했지만, 김포공항에서 대규모의 난리판을 벌일 만큼은 충분히 멍청했다. 갈색 잠바를 입은 한국 정보부 깡패들의 무리가 저명한 미국 인사들을 두드려 패고 바닥에 집어던진 것이다. (대표단 중에는 2명의 미 의원도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과 그의 아내를 거칠게 낚아채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태우고 출발해 버렸다. 우리를 서울로 데려다 줄 버스를 탔을 때, 남루한 겨울옷을 입은 수백 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김대중에 대해 자신들의 ‘선생님’이라고 외쳤다. 서울로 가는 길의 왼쪽 편에는 수천 명의 전경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보통 서울 사람들이 있었다. 청바지 차림의 노동자들,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긴 치마를 입은 어머니들, 찬바람을 막으려 꽁꽁 싸맨 어린아이들,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김대중의 귀국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마치 모든 인구가 전경과 시위대로 나눠진 것처럼 보였다.

대표단은 곧 주한 미 대사관으로 가 미 대사의 브리핑을 들었다. 리처드 ‘딕시’ 워커 당시 주한 미 대사는 브리핑 내용을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손을 흔들어 가며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찬양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록 김대중이나 공항에서의 폭력 사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대표단에 속해 있었던 로버트 화이트 전 엘살바도르 대사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질문을 퍼부었다. 워커는 매우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어떻게든 여전히 김대중의 귀국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며, 공항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것은 미국 대표단의 잘못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사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대사관 직원 케네스 퀴노네스는 공항에서 대표단과 만나 전두환 정권의 행태에 대해 대신 사과했다. 그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워커는 주한 대사 임기 동안 한 번도 김대중을 대사관에 초대하지 않았다. 워커는 내게도 노골적인 경멸을 표시했고(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추측은 할 수는 있다) 악수조차도 거부했다. (미국의 대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능하고 동시에 무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서울에서의 첫날, 대표단은 김대중이 보안 당국에 잡혀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대표단은 그가 완곡히 말해 ‘가택연금’이라 불리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경은 김대중의 집 주변을 둘러싸고 그의 집 바로 옆집을 점유했으며,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처럼 촘촘한 그물과도 같은 보안 당국의 통제선을 지나, 대표단은 그의 집에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김대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를 제의하면서, 대표단의 방문에 감사를 표하며 감동적인 연설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2년 이상이나 이 숨 막히는 가택연금에 처해져 있었다.

대표단이 미국으로 떠난 한 달 뒤, 필자는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김대중의 집에서 개인적인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김대중은 동교동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필자는 평화봉사단 교사였을 때, 바로 근처인 서교동에 살았었다. 김대중의 수수한 집이 과거 필자가 살았던 중학교 교사 가족의 집과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김영삼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고, 대화 중 많은 시간을 김영삼에 대한 비판에 할애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첫 저서(<한국전쟁의 기원 1권>)를,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부를 읽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우리는 또한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반정부시위의 출발점이 됐던 ‘한국의 천안문 사태’이며, 1980년대에 독재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을 조직했고 1990년대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광주의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범죄자들은(전두환과 노태우) 반란죄와 내란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나간채 전남대 교수와 같은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재판과 1997년 김대중의 대선 당선은 광주·전남 주민들에게는 명백한 ‘승리’를 의미했다. 비록 그들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으로부터 15년 후에 왔지만 말이다. 이것이 이 지역 민중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은 정성 들여 가꿔진 희생자 묘역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고 있는, 노무현 정부 시절 새로 지은 기념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1987년 9월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반응, 그것은 내게는 한국전쟁 이후 현재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장 구역질 나는 위선과 기회주의와 인종주의의 표현이었으며 미국이 표방해 왔던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최대의 배신이었다. 미국인들, 특히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은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진압 과정에서 중국 지도자들이 보인 배반 행위에 대해서는 끝없는 비판을 제기했다. 미국이 천안문 사태에는 어떤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 진압에 관여했던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저널 오브 커머스> 기자였던 팀 셔록이 1996년 정보공개법에 의해 획득한 광주항쟁 관련 비밀해제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최고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명백히 전두환과 그 일당을 지지하기로 했다. 이는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이라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도전이 될 만큼 심각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문건을 읽어 보면,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나 그가 서울에 파견한 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 안보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특히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였던 리처드 홀브룩 등의 ‘자유주의자’들이 1980년에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광주에서 살해되거나 고문당한 젊은이들 수백 명의 피 말이다.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에서 열린 중요한 회의에서 브레진스키는 미 정책검토위원회의 결론을 이렇게 요약했다.

“단기적으로는 (독재자를) 지원하고,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발전을 위한 압력을 가한다.”

광주항쟁에 대한 그 위원회의 태도는 “우리는 온건책을 권고했으나, 한국인들이 질서 회복을 위해 필요로 할 경우 무력 사용을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만약 광주 시민들에 대한 진압이 “많은 인명 손실을 수반”할 경우에는 위원회를 다시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을 때, 홀브룩과 브레진스키는 또다시 독재자에 대해서는 참아야 하고 북한을 우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며칠 후 미 항공모함 미드웨이 호가 이끄는 해군 태스크포스 전단이 한국 영해에 진입했고, 홀브룩은 기자들에게 한국 안보에 대한 ‘폭넓은 고려’없이 “광주사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대(對) 한국 정책이 미국의 일반 국민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엘리트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엘리트들은 미국에서 대통령이 바뀌어도 초당적인 기반 위에서 일하며 북한을 봉쇄하고, 남한 내에 있는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억누르는 일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한국의 엘리트 그룹 밖에 있는 이들의 의지는 존중하지 않는다.

미국 내 한반도 정책 엘리트들의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과 영구적인 영향력은 지난 20년간 북한 핵 프로그램 문제에서 나타났던 미국의 대응을 보면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다.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모두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심각하게 검토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본보기다) 한반도 정책 엘리트들의 의식은 또한 워싱턴의 김대중에 대한 불신, 노무현에 대한 전반적인 혐오감도 설명해 준다.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 있었던 일들도 그러한 패턴을 분명히 보여줬다.

광주항쟁이 끝나고 약 1주일 후, 그토록 인권을 존중한다는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 수출입은행장을 서울로 보내 신군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카터는 6억 달러의 대한(對韓) 차관을 즉시 승인하기도 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 한국인들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광주사태와 천안문사태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중적 태도 덕택에) 큰 도움을 받았다. 천안문 사태 후 중국정부 및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등 미국 측 인사들의 공식 비공식 베이징 방문을 모조리 비판하면서 커다란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 반면 한국에서의 [광주] 살육 이후 숱한 미국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지만, 이를 문제 삼은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 내부의 혼란은 북한을 자극할 뿐이며 한국의 안보(그리고 당연히 기업 활동 환경까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라는 주문(呪文) 같은 말만 되뇌였을 뿐이다.

광주항쟁 후 새롭게 등장한 독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미국의 지지 의사를 밝히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첫 미국인은 ‘딕시’ 워커였다.(1980년 6월 6일) 그는 광주 시민들이 “도시 테러와 폭동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언론들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그가 주한 미국 대사에 임명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정확한 예측이었다) 그 뒤로는 제퍼슨 쿨리지(T. Jefferson Coolidge, Jr.)가 한국에 왔다. (6월 10일) 기업가인 그는 1970년대 중반 하버드대학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한국 정부와 협상했던 인물이다. 우파 안보 전문가인 프랭크 트래거(Frank N. Trager)는 8월 5일 들어갔고, 잠시 뒤에는 세계적인 은행가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가 한국을 방문했다. (9월 18일) 그에 앞서 버클리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광주항쟁이 있기 전인] 4월 다른 누구보다 빨리 한국을 방문, 소련이 김일성의 무력 통일 정책을 “강력히 승인했다”는 말을 모든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이) 했고, 같은 해 10월 한국에 다시 가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리처드 스틸웰은 과거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중요한 일을 했던 인물로 평생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1961년 이후 독재자들을 전면적으로 옹호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광주항쟁 직전 한국에 가서 전두환에 대해 미 민주당이 어떤 생각을 하건 공화당은 그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요컨대, 카터, 홀브룩, 브레진스키에서부터 새로 대통령이 된 레이건까지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도부는 한결같이 전두환의 권력 찬탈을 지지했다. 레이건은 1981년 (자신의 대통령 취임 이후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 백악관을 방문한 전두환을 맞이하며 그가 ‘새 시대’를 개척했다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때까지 최소한 1만 5000명의 반체제 인사들이 ‘재교육’ 캠프[삼청교육대]에 억류됐다.

전두환의 부상을 지지했던 일부 미국인들은 상당한 보답을 받았다. 1984년 한국 언론들은 스칼라피노 교수가 대우그룹의 자문역을 맡게 됐다고 보도했는데, 연봉은 5만 달러였다. 미국의 부통령이었다가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스피로 애그뉴, 리처드 홀브록(현대그룹 자문역), 전두환의 백악관 방문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 등은 한국 기업의 고위 고문이 됐다. 리처드 스틸웰은 1986년 한국의 재벌 한일그룹의 자문역이 되었으며 액수 미상의 급여를 받았다.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민주화는, 보수적인 구세대들이 생각하듯 미국의 지지에 의해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정치적 열망을 탄압하는 독재자들에 대한 미국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지지에 맞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움직였고, 과거 반체제 활동을 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을 이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1945년 이후 기나긴 독재와 군사주의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8년 8월 김대중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아 경의를 표했다. 광주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을 만난 김대중은 기자들에게 광주항쟁에 대해 “김대중 정부 탄생의 밑바탕”이라며 독재자들에 항거했던 자신의 용기에서 중요한 뿌리였다고 말했다. “나는 광주 시민들과 5.18 영령들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재자들의 살해 협박에도 결코 굴할 수 없었다.” 광주항쟁이 준 또 하나의 교훈은 나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 교훈은 한국 학생들이 옳았고, 한국인들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되며,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련하고 평화로운 개혁

김대중을 결코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았던 미국인들은 1998년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된 것에 무릎을 꿇고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당시 김대중은 첫째, 파산한 한국 경제를 물려받았고 둘째,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동결시킨 대북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1994년 10월 이후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해야 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던 1998년 2월 한국을 방문한 나는 놀랐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교통 체증도 없었고, 거리에는 차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국수집에서는 1달러도 안 되는 ‘IMF 점심’을 팔았다. 대형 빌딩에는 “IMF 신탁통치 철폐”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월급쟁이들은 거리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행진하며 IMF를 비난했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찾고 있었다. ‘한국의 기적’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는 사상 최대의 인파인 5만 명 이상이 몰렸지만 김대중은 자신을 뽑아 준 수만 명의 일반인들이 참석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 김대중은 진지하고 감동적인 취임 연설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을 ‘국민의 대통령’이라고 선포하며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겠다”고 말했다.

김대중은 또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정의를 최우선의 가치에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 닥친 경제적 위기를 설명하면서 “충격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케네디 이후 모든 미국의 대통령들로부터 칭송받았던 산업 경제는 IMF의 눈짓 한 번에 하룻밤 만에 ‘정실 자본주의’의 악몽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은 “[경제적] 고통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선량한 국민들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1997년 말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가 한국을 강타했다. 그해 여름 태국의 통화 위기에서 시작한 금융위기는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11월이 되자 강력한 태풍이 되어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 경제는 12월 초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국제통화기금(IMF)은 570억 달러의 구제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IMF는 구제금 투입에 앞서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매우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국의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를 전면적으로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한국의 통화 가치는 반 토막 났고, 국민총생산(GNP) 순위는 세계 11위에서 17위로 곤두박질 쳤다. 40여 년 가까이 지속적인 성장을 해 온 한국 경제에 날아든 치명적 타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잔인했던 것은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을 비판하고, 한국 경제를 뿌리째 바꾸려는 IMF와 긴밀히 협력하는데 있어 미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했던 역할이었다.

IMF의 구제금융이 투입된 후, 미국의 영향력 있는 분석가들은 한국의 발전 모델에 독설을 퍼부었다. 수십 년에 걸친 한국의 수십 년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자신들이 그토록 칭찬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 모델에 대해. 스탠리 피셔 IMF 수석 부총재는 한국 모델과 ‘주식회사 일본’ 모델에서는 진정한 구조조정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에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1960년대 독재 정권 시절 탄생한 경제적 거래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며 그러한 상황은 “강력한 정부 규제, 끝없는 기업 확장, 해외 자본과 경쟁자들의 불신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나라 전체 부(富)의 1/3을 차지하는 목마른 재벌들은 “거대한 괴물”이며, “은행 대출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직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다. 독일 모건 그렌펠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에드워드 야데니는 “‘주식회사 한국’이 이미 파산했다는 게 문제의 진실이다. (…) 서류를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이건 좀비 경제다”라고 멸시했다.

세계의 어떤 반체제 정치인보다 과거 독재자들로부터 유린당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됐던 바로 그때 한국에 금융위기가 닥쳤다는 것은 크나큰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김대중은 고성장 경제와 함께 한국이란 나라의 특징이 되어 왔던 독재 체제에 대한 용기 있고 끈질긴 저항의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미국과 IMF가 한국에서 자신들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있게 했던 핵심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그 성숙한 한국의 시민사회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김대중의 당선은 국가-은행-재별 결탁 체제를 오랫동안 비판해왔던 사람들, 그리하여 김대중과 같이 탄압을 받았던 이들에게 권력을 쥐여 줬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무르는 이들이(global managers)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두려워했고(그들에게 김대중은 급진주의자나 ‘포퓰리스트’로 여겨졌다), 미국 정부는 김대중을 탄압했던 독재자들의 뒤를 오랫동안 봐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아이러니는 더욱 커진다.

미국 정부와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김대중이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지도자가 됐다는 시각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미국의 한 외교관은 [대통령 선거 전인] 97년 11월 20일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기업인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다운사이징을 요구할 수 있는 비상 금융 사태가 한창인 상황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 (…) 그 불을 끄는 데 김대중이 힘을 발휘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적인 시스템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정치 지도자는 김대중밖에 없었다. 그가 정치를 해오면서 줄곧 주장했던 개혁은 IMF가 한국에 요구한 내용과 유사한 것이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강력한 노동조합이 개혁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월 노동 측의 이해관계를 노련하게 달랬다. 정치를 개혁(transformation)하겠다는 커다란 약속을 하면서 김대중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조 지도자들을 기업과 정부 측 지도자들과 함께 만나도록 함으로써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공정한 정책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한 ‘수뇌부 협상’(peak bargaining)에 노조가 참석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전례 없는 커다란 정치적 성취였다.

치열한 협상 끝에 김대중은 노동 측이 대규모 정리해고에 동의하도록 했다. 그로써 위기가 오기 전 2%였던 실업률은 6%로 3배 늘었다. (서양에 비한다면 그리 높은 실업률이 아니었다) 실업률은 이후 8%로 올라갔지만 2001년이 되면서 4% 이하로 낮아졌다. 대신 노조는 법적인 존재 권한을 부여받았고, 정치에 참여해 공직 후보자를 낼 수 있는 권한도 받았다.

개혁 과정에서 핵심적이었던 것은, IMF로 인한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미국 기업가들이 잘하는 짓이다)한 게 아니라 그 고통을 공평하게(fair and across-the-board) 나누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어발 경영을 하는 한국의 재벌기업을 철저히 개혁했다는 것을 뜻한다. 김대중은 대통령 당선 직후 한 인터뷰에서 금융 위기에 대한 군부 독재자들의 책임을 지적했다. 독재자들이 국민들을 속이고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며 경제 발전에만 골몰한 나머지 “정경유착”의 구조가 형성됐다는 비판이었다. 김대중은 정부와 기업의 유착 관계를 개혁하고 해외 투자를 유치하며 수출을 늘리는 것이 위기 탈출의 해법이라고 말했다.

최고 재벌들은 엄청난 부실 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대우는 파산했고 설립자인 김우중은 검찰 조사를 피해 해외로 도피했다. 현대는 수익 배분과 강성 노조와의 관계에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삼성만이 비교적 적은 상처를 입고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처럼 경제적 위기가 깊었던 만큼, 그 위기를 해결한 것은 결국 김대중의 업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대중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는 역사적인 변화를 겪었고, 위기를 겪은 지 2년도 못돼 고성장 경제로 회복했다. (1999년 성장률은 11% 이상이었고, 2000년은 9%였다) 한국의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는 강하고 활기에 넘쳤으며 더 이상 군부의 협박을 받지 않게 됐다. 노동자들은 IMF가 요구한 개혁 조건을 폐기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유동성 위기, IMF가 요구한 개혁, 동북아시아의 발전 모델을 통제하고자 하는 미 정부의 욕망, 한국의 민주화라는 요소들이 기이하게 결합되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1997년 이전에는 없었던 훌륭한 기반 위에 한국을 올려놨다.


햇볕정책 : 통일을 지향한 화해

1987년 민주화가 가져온 최후의 축복은 한반도 주민 최대의 염원인 한반도 통일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독재자들의 지배가 계속되는 동안 통일의 원칙은 단 한 가지였다. 상대방에게 먹히든가, 상대방을 먹든가. 1987년 이전 남한의 지도자들은 단 하나의 통일방안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쪽의 체제를 북쪽으로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을 염두에 두고 화해와 평화공존, 경제교류와 인적 접촉의 과정을 시작했다. 이는 북한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개방시키며, 궁극적으로 민주화시킬 수 있는-비록 더디게 진행되기는 하겠지만-유일한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이전의 남북대결 상태와 비교해 엄청나게 많은 이득을 가져왔는데 북쪽보다는 남쪽의 이득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머리에 뿔 난 도깨비로만 여겨졌던 남측 주민들의 북측 주민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저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형제, 자매, 사촌으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화가 없었다면 이러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을 포함해 김대중이 가져온 엄청난 변화는 2000년 6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남북한 국가원수가 1945년 한반도 분단 이래 처음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을 때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98년 2월의 따뜻하고 햇볕이 포근했던(“햇볕정책”을 발표하기에 아주 적당했던) 그날, 김대중 신임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 북에 대한 대한민국의 전략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취임 연설을 통해 북과의 화해협력을 적극 추진할 것과 남북의 평화공존을 다짐했으며 나아가 워싱턴 및 도쿄와 관계개선을 이룩하려는 북의 시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북미, 북일 관계 개선의 조짐만 보여도 화들짝 놀랐던 이전 지도자들의 태도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 것이다. 곧이어 그는 북에 대한 대규모 식량 지원을 승인하고, 북측과 남측 기업 간의 사업거래에 대한 각종 제한을 해제했으며, 1998년 6월 워싱턴 방문 때에는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촉구함으로써 자신의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김대중은 명시적으로 (사실상 전임자들의 대북정책이었던) ‘흡수통일’을 거부했으며, 오랜 기간에 걸친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함으로써 통일의 시기를 20-30년 뒤로 늦췄다. 이는 용기 있는 자세였다. 1990년대에는 ‘독일 모델’이 남측에서 압도적 영항력을 행사하면서 대다수 한국인들이 조속한 통일, 남에 의한 북의 흡수통일을 예상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과의 대대적인 화해 노력과 함께 자신의 고향이자 저항의 본거지였던 호남과의 화해 노력도 시작했다. 호남 지역은 (동학운동이 시작됐던) 189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식민지배세력), 미국, 그리고 역대 남한의 군사독재자들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저항해 왔다. 대통령 취임과 함께 그는 전두환, 노태우 두 군사 독재자에 대한 사형 및 무기징역형을 사면했다. 전남대학교의 나간채 교수가 지적했던 것처럼, 1996년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재판과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일으켰던 광주 및 전남 시민들의 승리를-비록 오랜 기간이 걸렸고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는 했지만-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김대중이 시작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 ‘미래를 향한 역사’는 한국현대사, 그리고 한국과 이웃 국가들과의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꺼내놓고 새롭고 정직하게 검토해보자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와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비로소 남한 주민은 하나의 통일된 국민(one unified nation)이 됐고, 모든 정통적이고 이단적인 ‘관점들’이 제기됐으며, 평양과의 화해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북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북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공산주의 악마가 아니라 또라이 삼촌 밑에서 고생하는 형제·자매로 바뀌었다. 김대중의 후계자인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4월의 한 중요한 연설에서 일본 지도자들이 1930-40년대의 불행했던 과거사와 관련해 이웃 나라들과 공통의 이해를 추구하기보다는 그저 선조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만 급급하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내정치든 국제정치에서든, 진정한 화해란 오직 역사적 진실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여러 가지의 공식적인 역사 조사를 진행하는 목적은 누군가를 탓하거나 냉전시대의 전투를 다시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남과 북의 화해를 추구하고, 한때 적이었던 상대방에 대해 동감(sympathy)하거나 공감(empathy)하는 것이 아닌, 이해(독일어로 verstehen)하자는 것이다. 적을 이끌었던 원칙들이 무엇이었는지, 그것들이 아무리 끔찍하고 지난날 적과 함께 벌였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상처를 줄 만큼 아무리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제대로 알아보자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한국 병탄 이후 지난 한 세기 동안 흘린 피와 고통의 모든 책임을 (대다수 미국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어느 한 쪽에만 떠넘긴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며, 비정하고 가차 없을 정도로 야만적이었던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관견(管見)으로 재단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정한 사법시스템-조사, 재판, 증언, 판결, 사과, 숙청, 보상 등-하의 진혼의 테크닉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화해하고 위무하며 한 많은 넋을 고이 잠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적(敵)의 핵심적 원칙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적과 함께 지나간 역사를 모든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적의 세계관에 대해 의미 있는 호소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한쪽이 한 일을 전면적으로 인정한다면 상대편이 갖고 있는 모든 불평불만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을 잘 모르고,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그것이 옳든 그르든-를 잘 모른다면 이 복잡한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참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2001년 3월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김대중 대통령이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을 방문하는 최초의 외국 정상으로서 백악관을 찾았을 때, 부시는 김대중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며 김정일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둥, 북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둥 훈계를 늘어놓았다.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그가 김정일을 신뢰했거나 과거 북한의 약속 파기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어쨌거나 김대중에 대한 부시의 태도는 이후 6년간 벌어질 사태를 보여주는 전조였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면적인 적대시 정책과 공개적인 선제공격 위협,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북의 미사일 및 핵무기 개발. 북한은 2009년 핵폭탄 및 미사일 실험을 감행했으나 미국은 아무런 보복을 가하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의 실패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마비되다시피 했고,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을 만나 거드름을 피웠던 그 집무실에 거의 갇힌 상태나 다름없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 지냈기 때문이다. (부시는 2006년 관중들의 야유가 두려워 미국 대통령이라면 연례적으로 하는 프로야구 시구식에도 나서지 못했다.)

전임자들의 대북정책이 북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소리 높이 외쳤던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부시는 2008년 4월 그에게 캠프데이비드 별장 주말 방문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7년 전 김대중에게 대한 박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워싱턴의 학자, 논객들은 이명박의 현명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제 비로소 ‘성숙한 인물’이 다시 한국을 다스리게 됐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국무부, 브루킹스 연구소, 그리고 여타 싱크탱크들이 주최한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갔었는데 전직 외교관이나 군부 인사들이 이명박을 치켜세우고 한미관계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 조지 W. 부시의 김대중에 대한 태도는 미국인들의 김대중 혐오를 대표적으로 보여줬다. ⓒ연합뉴스


정치가들과 역사가들

나는 수십 년에 걸쳐 김대중 대통령과 적지 않은 개인적 인연을 쌓아왔다.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오던 날, 내가 묵을 호텔에 도착하자 조선일보 기자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당신의 친구인 김대중에 관해” 인터뷰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답신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이 당선된 직후인 1998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랜 한국인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커밍스 교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폴리페서(political scholar)가 됐구려.”

그의 말은 틀렸다. 나는 정치적 학자(political scholar)가 아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모든 학자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학자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몰가치적인’ 서술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김대중을 수십 년간 알고 지냈지만 내가 대학교수로서 하는 일 외에 그가 내게 뭔가를 해달라고 부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에게 단 한 번도 청탁을 해본 일이 없다. 나와 그의 관계는 그저 때때로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7월, 연설을 위해 그가 워싱턴대학에 왔을 때였다. 그로부터 수주일 후 그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에 납치돼 살해 직전의 위기에 몰렸었다. 역사학자인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 교수는 당시 아직 대학원생에 불과했던 내게 워싱턴대학의 여름 학기 강좌 2개를 맡겼다. 또 오랫동안 한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던 팔레 교수는 10월 유신 이후 망명객으로 해외를 떠돌고 있던 김대중을 초대했다. 당시 김대중은 한 강의실에서 15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했다.

7년 후 김대중이 (전두환 군부반란세력에 의해) 내란 혐의로 기소되었을 당시, 워싱턴대학에서 그가 행한 연설 중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도 기소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15명의 청중 중 한 명이 그의 연설을 녹음해서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넘긴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많은 대학들이 ‘한국무역재단(Korean Trader's Foundation)’이라는 단체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고 있었다. 한국무역재단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학술적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한국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외곽조직으로, 그 후 박동선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 의회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후 시애틀의 한 한국계 미국인 인권운동가 집에서의 만남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그는 자신의 천주교 신앙이 자신의 정치적 선택 및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언젠가는 민주 한국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군사독재의 무자비함을 감안한다면 박정희 독재의 극성기, 그것도 자신이 납치당하기 수주일 전에 이런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그와 오랜 시간 같이 하게 된 것은 (앞에 말한) 그가 미국 망명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1985년 2월이었다.

나의 오랜 친구 중 한 명은 김대중의 측근으로 그를 도왔는데, 나중에 그는 내게 DJ는 마키아벨리에게도 한 수 가르쳐줄 정도의 노련한 정치꾼이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의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정치가가 권력이 없다면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을 것이며, 권력의 추구야말로 정치적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권력을 추구하면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수십 년간, 기회만 되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일련의 독재자들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 왔음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미래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비전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의 주위에 집결시켰으며 그 권력을 민중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썼다. 그의 양대 업적은 1조 달러 규모의 세계 11위 경제, 그리고 남쪽의 보통사람들이 휴전선 너머 북의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뒤바꿔버린 남북 화해의 길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오늘날 아랍의 용감한 시위 군중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1980년대 한국 반체제 세력의 당면 과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축복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축복을 헤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중상모략하는 미국의 인사들, 당신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의적인 독재체제, 예비 구금, 일상적 고문, 만인에 대한 정보기관의 감시, 노동운동의 절멸, 매일매일 전두환의 사진과 말씀을 1면에 게재하는 꼭두각시 언론 등 정치적 암흑 속에 살았던 한국인들이 확실하고 분명한 승리를 쟁취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한국인들은 우리에게 근대 경제를 건설하는 방법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란 밑으로부터, 수백만 보통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전두환을 무너뜨린 것은 거리에 나선 한국의 대중(大衆)들이었고, 이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든 심볼은 김대중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강인한 민주주의자이자 독재에 맞선 투사, 한국의 정치경제를 구해내고 개조한 인물, 남북한 화해의 길을 연 지도자, 그리고 마키아벨리에게도 한 수 가르쳐줄 정도의 능란한 정치가”

각 나라들은 자신의 역사적 경로와 본질적 조건에 따라 각자만의 특유한 방식으로 민주주의로 이행해간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가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군사독재의 무자비함, 그리고 비극적일 정도로 적대적인 국제환경 때문이다. 이에 대해 미국이 대답해야 할 부분은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브루스 커밍스 / 미 시카고대학 교수
[번역 : 곽재훈ㆍ황준호 기자]


※ 필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미국의 역사학자로 1943년 출생, 스와스모어대학을 나와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 문제가 그의 학문적 출발점이 됐으며 이후 동아시아 정치경제, 미국과 동아시아 관계 등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1981년과 1990년에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 1,2권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 미국과 한국 등에서 한국학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때는 평화와 외교를 기본노선으로 하는 대 한반도 외교정책의 이론적 틀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과 TV>(1993), <한국현대사>(1997) 등의 저서가 있으며 지난해 발간한 저서 <한국전쟁(The Korean War: A History)>을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헌정했다.

※ [ ]는 옮긴이가 추가한 것입니다.
※ 원문에 있는 16개의 주석은 생략했습니다.
※ 원제는
“Not Counting Your Blessing: Americans and Kim Dae Jung”

작성일:2011-06-22 10: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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