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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귀화 唐의 한림학사盧穗가 도시조4백년전 울진입향170가구에 4백명 살아

본사에서 기획하여 연재하고 있는 뿌리찾기는 스물 네번째로서 금회는 광산노씨(光山盧氏)편이다. 지금까지 먼저 울진의 토성들을 찾아 나섰고, 다음으로 본관별 인구순위에 따라 추적해 가고 있는데, 각 문중의 사정에 따라 소개되는 순서가 간혹 바뀌기도 한다.그런데 지금까지 소개한 문중마다 혁혁한 역사적 인물들이 즐비하여 사실 어느 문중이 진짜 명문인 지를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물론 명문가라고 규정하는 데는 어떤 명확한 기준이나 원칙이 있어야 하겠지만, 금번에 대면하는 광산노씨는 고려~조선을 통괄하여 꾸준히 번영을 누려 온 가문이며, 오늘날도 크게 발흥하고 있는 문중으로서 한국 최고의 명문가라 부른다 하여 별반 무리가 없는 줄로 안다.

그것은 도시조가 신라 말 중국으로부터 건너와 고려초기 아들 9명 모두가 봉군되었고, 숱한 문장과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에서만 총 91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다.대통령은 하늘이 만드는 인물이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20만이란 소수 성(姓)으로서 근년 노태우, 노무현 두 대통령을 낳은 집안으로 옛날 같으면, 한 가문에서 2개의 왕조를 개창한 결과이니, 이보다 더한 명문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면, 광산노씨 집안은 한국 최고의 명문가 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우리나라 노씨(盧氏)의 연원은 중국 범양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낸 노 수(盧 穗)가 877년 (신라 헌강왕 3년)에 황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와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정착 하였다가 용강 쌍제촌으로 옮겨 뿌리를 내림으로 시작되었다.

도시조 노수의 아들 아홉 형제가 나라에 공을 세워 각각 광산 교하 풍천 장연 안동 안강 연일 평양 곡산백으로 봉군되어 구백봉관(九伯封貫)이 되었다.

그밖에 신창 해주 안강 만경은 이들 9관(九貫)에서 분관되었고, 용성. 영광. 동성. 선산. 함평. 청도 등도 모두가 동조동근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다.

노씨(盧氏)는 아득한 옛날 중국의 강(姜)씨에서 노씨로 창성(創姓)하였다고 한다.

강태공의 6대손인 문공(文公)의 증손 중에 혜(?)가 있었는데, 제(濟)나라의 정경(正卿) 벼슬에 올랐던 사람으로 “노현(盧縣: 지금 중국 산동성 창청현)”이라는 고을을 식읍으로 받아, 후손들이 이 고장의 이름을 따서 성(姓)을 “노(盧)씨”로 정하였다.

 현재 울진에는 노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모두 173가구에 407명으로 모두 도시조 수(穗)의 후손이라고 보아 울진의 본관별 성씨 인구순위는 대략 27위 정도이다

 

▲주대 제국 초대왕 강태공망여망 성조영정 (노씨 혜시조 11대조)

 

이들 중 90%인 314명의 본관이 광산(즉 광주)이며, 교하가 13가구에 36명, 풍천이 7가구에 15명으로, 나머지 본관의 인구는 그 수가 극히 미미하다.

 02년 정부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현재 노씨(盧氏) 전체의 수가 모두 약 7만 가구에 약 22만명으로 성씨별 인구순위가 약 33위에 달해 중규모의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본관별 인구수에서는 성씨 총인구수가 20만을 넘어가면서도 우리나라 100대 본관별 성씨에 들어가는 관향이 없어 좀 특이하다.

그것은 다른 성씨와 비교해 특정 계파가 번성하지 않고, 광산, 교하, 풍천 등의 본관이 고루 번성해 엇비슷한 인구수를 가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노씨 본관별 인구수를 살펴보면, 광산이 약 7만7천명 (광주 4만9천명 포함)으로 최고 많고, 다음으로 교하가 5만3천명, 풍천이 3만9천명, 장연이 8천4백명 정도이다.

노씨의 대종을 이루는 본산지인 광산(光山)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옛 지명으로 1895년(고종 32)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35년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광산노씨(光山盧氏)는 이설이 있지만 도시조(都始祖)의 아들 9형제 중 맏아들 노 해(盧 垓)가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됨으로서 광산백(光山伯) 해(垓)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때 정승(政丞)을 지내고,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진 만(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호군(大護軍) 서(恕)를 일세조로 계대(繼代)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세계(世系)를 달리하고 있다.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대호군(大護軍)의 증손 숭(嵩)이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창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태종(太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대제학(大提學) 유간(有幹)의 손자 준공(俊恭)은 고려 말 단상제(短喪制)가 성행하던 때 3년상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정려(旌閭)를 하사(下賜) 받았다.

중종(中宗)과 선조대(宣祖代)에 걸친 명신 수신(守愼)은 1515년(중종10)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청환요직(淸宦要職)을 역임하고 선조(宣祖) 때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 황(李 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도 깊은 교제를 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별제(別提)와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던 흠(欽)이 시(詩)와 글씨에도 능하여 삼가(三嘉)의 고암서원(古岩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극홍(克弘)은 임진왜란 때, 자제(子弟)와 일가 장정을 이끌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化旺山城) 방어에 참가 결정적인 공(攻)을 세웠다.

극복(克復)은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했고, 정묘호란 때는 고성(固城)에서 의병을 모아 군량(軍糧) 조달에 앞장섰고, 수신(守愼)의 증손 준명(峻命)은 홍원목사(洪原牧使)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던 계원(啓元)은 학문연구에만 진력,「오행설(五行說)과 「정성서의(定性書義)를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울진군지에 따르면, 노씨의 최초 울진입향은 약 4백년 전인 1636년(인조14년) 노수신(盧守愼)의 증손 어모장군(御侮將軍) 노우명(盧佑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의 난을 피하여 상주로부터 울진읍 신림리 청계동에 들어와 학문과 의를 숭상하며 후세교육에 힘썼다.노우명의 후손들은 노천주(盧天籌)의 신림파, 노천수(盧天壽)의 아산파, 노천도(盧天燾)의 성산파 등 삼파가 분파되어 전국에 산거하고 있다.

울진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시월 초 이튿날 울진읍 온곤동 학미동(鶴尾洞) 있는 입향조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오고 있으며, 매년 8월 중 일정을 잡아 종친회를 열어 혈육지정을 나누고 있다 한다.

다음은 1895년 교하(交河, 현 경기도 파주?)인 노성기(盧成箕)로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강필(盧康弼)로서 나라가 어지러워 원주로부터 입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묘하였는데, 북면 두천리 장평동(長坪洞)에 묘소가 있고, 그의 자손들이 울진 삼척 경주 등 전국에 퍼져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입향조의 울진 후손들은 결국 한 할아버지 자손으로 지난해는 버스 1대로 1926년 도시조와 그의 아들 9형제를 모신, 노씨문중의 성역인 광주시 오치동 삼각산 기슭에 자리한 삼릉단(三陵壇)에 참배를 다녀왔다.

 

 

 

노일순(66세, 울진읍 명도리) 울진군종친회장은 노씨문중은 울진종친회의 결성도 오래되었지만, 울진에서는 처음으로 1979년 중앙종보를 배포할 정도로 결속력이 뛰어 난 문중으로 근세 노기일(노기일)씨는 울진군의 초대군수를 지냈고, 종인들 모두가 성실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상숭배가 철저하다는 것이다.

특히 노씨 문중은 중국에 3천1백만명의 종친이 살고 있고, 대만 등 동남아 약 1백만명이 살아 수년전 <노씨세계종친회>가 결성되었는데, 지난해에 중국에서 개최된 세계종친대회에는 노태우 전.대통령이 참석하고 돌아 와 노씨문중의 기운은 이제 반도에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며 문중발전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울진군종친회 연락처 : (노일순 회장, 011-9356-3281)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7월 16일 0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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