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소금’ 기술자 근남면 수산리 이진석 옹

60여년전 근남 염전 ‘염한(鹽漢)’

지역내 유일한 생존자

전통과 명성 되살릴 염밭 개발한다면

기꺼이 기술전수할 것


음식의 맛은 뭐니 해도 소금의 질에서 결정된다. 과거 소금 굽는 일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을 염한(鹽漢)이라 불렀다. 울진에는 현재 딱 한 분이 생존해 계신다.

약 60수년전 근남면 수산리 비래동 염전에서 소금을 굽던 염한 이진석(85세, 현재 수산리 거주) 옹은 울진의 토염 맛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과거 비래동에서 굽은 토염을 한 웅큼 입에 집어넣으면, 짜다기 보다 달달했는데, 요즈음의 소금 맛은 짜고 쓰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음식 조미료 산업이 발달되었지만, 아무리 최고의 기술과 정성을 들여 김치를 만들어도 옛날 토염으로 만들었던 김치 맛을 재현할 수 없다고. 예전의 음식 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결국 소금의 품질 때문이라고 한다.

소금은 제조방법에 따라 크게 토염, 천일염, 화염으로 삼별된다. 토염은 염밭에서 마사토와 함께 응축한 뒤 우려내서 굽는 방식이고, 천일염은 말 그대로 태양볕에 의존하여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식이며, 화염은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말려버리는 방식이다.

이진석 옹은 일제 당시 자신이 알기로는 영덕과 평해 쪽에는 아예 없었고, 울진 해안에 3개소의 토염전이 있었다 한다. 근남 수산의 염전, 울진읍 군발 염전, 북면 덕천 염전이다. 토염전은 인력과 생산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방식이다.
일제 말기 외국으로부터의 수입 소금이 들어오고 화염방식이 번성하자, 3개소 모두 쇠퇴하고 말았다는 것. 그 중 수산 염전이 해방 후 약 6~7년 지속되었으나, 가장 늦게 폐쇄되어 염전 마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울진엑스포 당시 해변 주차·캠프장으로 활용되었던 수산리 염전 마을에는 해방직전 최대 60여 가호가 사는 중규모 정도의 마을이었다고. 현재는 마을 전체와 염전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도로 쪽으로 해송이 심겨 있을 뿐 해변 빈 광장으로 변했다.

당시 염전 밭을 운영하던 염한은 4명뿐이고, 나머지 집에서는 고기잡이도 하고, 수산들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88년 염전 일대의 대단위 민간차원의 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당시 염전에 살고 있던 11가구 중 9가구는 현재의 수산리 ‘새동네’로 집단이주하고, 1가구는 울진읍으로 들어가고, 1가구는 ‘95년 1회 울진엑스포’를 추진하면서 이주했다.

그 당시 염전 동네는 가운데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남북으로 염전 밭이 조성돼 있었다고 한다. 남쪽에는 8꼭지, 4꼭지의 2명의 염한과 북쪽에는 4꼭지짜리 2명의 염한이 있어 결국 염전마을 전체 3천여평의 염밭이 있었다.

염전 한 꼭지는 150평이고, 두 꼭지를 ‘한자리’ 라고 불렀는데, 염한 한 사람이 염밭 ‘한자리’를 가꾸는데, 일꾼 한사람이 필요 해 두 명이 종사했다고 한다. 소금을 한 번 굽는 데는 대개 한달 정도 걸렸다. 소금 굽는 횟 수는 그해의 날씨에 좌우된다. 화창한 날씨의 기일에 따라 연중 봄`가을 2~3회 굽는다.

한자리에서 1회 소금 70~80말을 생산하는데, 당시 울진소금은 ‘황금소금’이라 불릴 정도로 품질이 좋아 소금 한 되가 쌀 한 되 가격과 거의 맞 먹어 염한의 생활은 부유했다고. 당시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300평당 벼농사 수확량이 쌀10말 정도를 생산했다고 하니, 염밭 한자리를 가지고 연간 3회 생산하면, 약 6천여평 이상의 벼농사 소득이었다.

이진석 옹은 비래동에서 태어나 17~8세 무렵 약 1년 정도 틈틈이 염밭에서 염부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 직접 많은 비용을 들여 염밭 한자리를 일구었다. 그러나 약 2년 정도 토염을 굽었으나, 천일염과 화염에 밀려 폐업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진석 옹은 연세에 비해 비교적 또렷한 기억력을 지녔다. 소금 굽는 방법은 염전의 바닥에 왕피천 강 뻘 흙을 넣고, 펴서 다지면서 평탄하게 만들어 딴딴하게 말린다. 그기에 산에서 채취한 마사토를 넣은 뒤, 약 3센티미터 높이의 바닷물을 퍼붓고 말려 써레질을 해 갈아 뒤집는 작업을 약 1주일 반복한다.

그 다음 마사토와 함께 응축된 소금을 끌어모아 또 바닷물을 부어서 표면 아래 뻘 흙으로 만들어 매우 딴딴한 웅덩이 같은 곳에 흘러 내리게 하여 마사토와 소금물을 분리한다. 한자리에서 두 사람이 약 열흘 정도 작업하면, 소금물 약 200 초롱 나온다.

이 소금물을 굴 껍질을 갈아서 횟가루로 만든 사방 10자(가로×세로 각 3m)의 대형 솥에 부어 24시간 주야로 달이면 비로소 황금소금 70~80말을 생산한다. 한자리 소금물을 달이려면, 사방 6자, 높이 6자의 많은 양의 땔감이 들어간다.


이렇게 생산된 고품질 울진소금은 바지게 꾼들이 와서 사 짊어지고 춘양 봉화장에다 가서 팔기도 하고, 남는 양은 울진읍장에도 내다 팔았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전통방식의 소금을 생산한 고품질 소금 1Kg에 3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이진석 옹은 “전통방식의 울진의 토염 즉 ‘황금소금’이 다시 생산되어 울진의 명성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이 한국의 음식 맛이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며, 필요하다면 기술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고 말했다.


                                                     /전병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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