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명룡 집필위원
고대왕조 상(商: 殷나라)은 동이족이 세운 국가였다. 오늘날 동이(東夷)에 대한 개념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동이의 대표 주자로 인식되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튼 동이족이 세운 상나라는 화하족(華夏族)의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화하 대일통사관(大一統史觀)에 의거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폭정을 일삼은 商의 주왕(紂王)에게서 민심이 자연스럽게 이동한 것처럼 적고 있지만, 서경(書經)을 보면 商과 周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목야전투(牧野戰鬪)에서 쇠절구공이가 핏물에 쓸려 떠다녔고 하니 왕조 찬탈의 처절한 살육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商나라 사람들은 우리와 닮은 구석이 많다. 우선 조상 제사를 잘 받들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습성이 그러하다. 周의 무왕은 商이 음주로 망했다하여 직접 주고(酒誥)를 지어 술을 경계했을 정도였다.

周를 세운 무왕은 공로에 따라 봉토(封土)를 분배하고 제후국을 세워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는데, 몰락한 商의 후손 녹보(祿父)에게는 패잔병을 이끌고 송(宋)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周의 일등공신 강태공(姜尙)은 그들을 몰살할 것을 주장했으나, 폭압에 대한 민심이반을 걱정한 주공(周公) 단(旦)이 반대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동이의 계보는 춘추전국시대 송나라로 이어졌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고사성어 가운데 송나라 사람들을 비하하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면 ‘조장(助長)’이라는 말은 송나라 어떤 사람이 곡식을 빨리 자라게 하려고 대궁 하나하나를 뽑아 올려놓는 바람에 곡식이 전부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했다. 또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은 송나라 사람이 쟁기로 밭을 가는데 토끼 한 마리가 그루터기에 받쳐 죽는 것을 보고 쟁기는 놓고 그루터기 옆에서 토끼만 기다렸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이런 이야기의 표면적인 내용은 송인을 비하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송나라 사람들의 엉뚱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를 두고 학자들은 머리 좋은 동이족의 습성이 고사에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천재들이 가끔 황당한 행동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어질고(仁) 몹시 순수하다는 점도 우리를 닮았다. 송의 양공(襄公)이 초(楚)나라와 싸울 때였다. 진을 치고 있는 송군(宋軍)을 공격하기 위해 초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공자목이(公子目夷) 장군이 양공에게 “적이 강을 반쯤 건널 때 기습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자 양공은 “그건 정정당당하지 않다. 정당하게 싸워야 참다운 패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도하를 마친 초나라 군사가 진용을 갖추고 있을 때, 장군은 또다시 “적이 진용을 가다듬기 전에 공격하면 대승할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양공은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괴롭히지 않는 법이다”라며 기다렸다. 그 결과 송나라는 크게 패하고 말았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성어는 거기서 만들어졌다.

조선 중종7년 때 일이다. 함경도 갑산 일대에 속고내(速古乃)란 자가 야인들 수백 명을 이끌고 수시로 침범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가축과 곡식 약탈을 일삼았다.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 무리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은 이지방(李之芳)을 시켜 군사를 이끌어 속고내를 공격하기로 의론을 모았다. 중종은 위로연을 열고 어의(御衣)와 궁시(弓矢)까지 하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부제학이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정당하지 않으니 군자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는 전혀 아닙니다.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라고 간청하여 기습토벌 작전은 취소되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 사림(士林) 정치의 문을 열었으며, 도학(道學)의 종주로 문묘에 배향된 분이다. 정암 이후 조선은 근 400년간에 걸쳐 군자를 지향하는 유학자(儒學者)들의 정치가 이어졌다. 한편 당시 일본은 ‘오닌의 난’이후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가운데,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들이 제각기 영토를 차지하고 대 살육전을 치렀던 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정암이 도덕을 내세워 기습공격을 반대한 해로부터 딱 8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壬辰年이면 되짚어보게 되는 역사적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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