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정년퇴임 후 사는 모습이 각양각색이라 도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살까 궁금한 모양이다.

정년을 한 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집안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계획했던 시집도 마무리 지어야 했고 산문집도 매듭을 지어야 했다. 내 딴에는 인생을 알차게 마무리 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일까, 아니면 퇴직 후유증으로 생활의 리듬이 깨진 것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끼니도 놓치고 잠을 설치면서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를 빼고 임플란트를 시술하느라 몸의 에너지가 소진된 탓일까. 두통약을 삼키며 9개의 머리뼈로 연결된 치아의 구조를 생각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좀 색다른 취미 활동을 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노래라곤 삼십년 전에 유행한 두 세곡 정도였다. 가끔 노래방에서 잘 하지도 못하는 옛날 노래나 부르는 내 자신이 민망하기도 해서 최신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음악교실을 찾았다.

요즘 관광지에서나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한창 유행하는 ‘내 나이가 어때서’와 ‘안동역에서’를 배우기도 했다. 몇 번 나가 보았으나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따분하기도 하고 지루했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것이 댄스였다. 유연한 나뭇가지에 새들이 날아 다닌듯하고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 가장 부드러운 운동이기도 했다. 남녀의 신체활동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댄스교실을 노크했다. 남녀가 어우러져 추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빼어난 미모의 여성도 볼 수 있을 것 같고, 지인들과 노래방에 갈 때면 남들이 흥에 젖어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나 아닌가. 인생의 황혼역에서 남과 어울리자면 춤도 출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내 등을 떠밀었다.  

송파문화원 댄스 교실을 찾아 갔다. 왈츠를 처음 접하였는데 스텝이 복잡하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젊었을 때부터 춤을 배운 사람들은 복잡한 스텝을 리드해 나갔다. 나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고급 운동을 넘보는 것 아닐까 싶기도 했다. 머리에서 꾸물거리던 글감이 다 날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무엇이든 배움 앞에서 용감해야 한다는 내 철학으로 열심히 스텝연습을 했다. 기초 댄스라고 우습게 보았는데 지르박도 그리 쉽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함께 배우고 있었는데, 어정쩡한 나를 보더니 움직이는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 열심히 나오세요, 좋은 운동입니다, 암 좋고 말구요” 두 분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노부부가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미끄덩하고 나긋나긋한 스텝을 밟는 블루스가 좋지만 그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스텝을 익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며칠 만에 숙달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많이 빼앗겨 글쓰기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열정이 있어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만에 춤을 그만 두었다.

톨스토이의 말이 생각난다. “참으로 중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생활이 단순하다. 그들은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노래를 배우고 댄스를 생각해 낸 것이 치통으로 인한 우울을 해소하기 위한 외로운 몸부림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춤 타령을 하다가 온 삭신이 쑤시고 아팠다. 안 쓰던 근육을 써 몸살을 앓았다.

사람은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이 있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은 친구 따라 강남 가기처럼 유연하지 않다. 남들이 댄스를 잘 춘다고 해서 따라 할 일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저축해야 할 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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