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15


전세중 재경 죽변출향인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할아버지는 규범적이고 검소하며 부지런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고, 학문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매사에 열심이셨다. 그런 인품을 잘 아는 가암 선생이 묘비문을 지었다.

“公의 심성이 순수醇粹하여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모나지 않기 때문에 원근과 친속들이 모두 좋아하여 조금도 불평과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같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사람도 나도 모르게 숨김없이 마음을 이야기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으나, 公이 적고績苦 끝에 토지도 장만하고 집도 새롭게 단장하였다.” 라고 썼다. 묘비명에 이르기를 “향중鄕中 사람들과 교우할 제 한희와 인정이 함께 하였지,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여 가업을 번창하게 이룩하였네, 저 봉평 당녹골을 손짓하며 지나는 사람들이 아까워하였지, 공의 행장을 대략적어 후인들에게 법이 되게 하였네.”라고 노래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할아버지는 가족들 곁에 쓸쓸함만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셨다. 1900년 5월 2일 울진 봉평리에서 태어나 1956년 8월 1일 향년 56세로 아쉬운 이별을 하던 날 조객弔客이 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의 얼굴만 어렴풋이 간직되어 있다. 온후한 품성을 지녔던 할아버지의 자손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따랐다.

내가 네 살 때로 기억된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는 마당에 톱밥을 널어 말리고 있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업어달라고 보챘다. 할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등에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 바람개비놀이를 하며 놀아주었다. 할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고모는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것 같다고 박장대소를 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농사일에 매달렸지만, 틈틈이 학문을 익혀 울진제동학교를 졸업하였다. 바쁜 와중에도 화초 가꾸기를 좋아해서 마당에 화단을 만들어 집안을 화사하게 꾸며 꽃잔치를 벌였다. 뒷뜰에는 무궁화꽃, 석류꽃, 배꽃, 국화꽃이 피고 졌다.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가 만든 화단의 꽃들을 감상하며 온화한 정서를 키웠다. 내가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은 할아버지 덕분이라는 생각이다.

근면한 할아버지는 농사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 시골에서는 대, 소변이 농작물의 밑거름이었다.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새벽녘 5리쯤 떨어진 후정리와 죽변 마을까지 찾아가 인분을 퍼 나르곤 했다. 그런 할아버지는 ‘똥장군’이란 별명으로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시는 농부셨다. 그런 성실함은 가세가 기우는 집안을 세우는데 톡톡히 한 몫 하였다.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가 이웃마을 인분을 퍼 담고 있는데 덜거덕 거리는 소리에 주인이 “밖에 누구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대답이 없자 다시 “밖에 누구요” 물으니 “나는 똥장군이요” 라고 대답하였단다. 

주인이 무안해 하며 “좋은 이름을 놔두고 왜 ‘똥장군’ 라고 하십니까.” 라는 말을 받아 할아버지는 “사람들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똥장군’ 이라는 별명도 개의치 않는 대장부이셨던 모양이다.

내가 일곱 살 때였다. 우리 밭머리에는 인분을 저장하는 곳이 있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옆 종조부 집을 짓기 위해 대패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장난삼아 나무 대패에서 나온 부스러기를 안경처럼 쓰고 집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까지는 50미터 쯤 되었는데 눈을 가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인분을 모아 두는 똥통에 빠지고 말았다.

허우적거리는 나를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구해 주었다. 똥을 뒤집어쓴 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똥통에 빠진 아이는 일찍 죽는다면서 손자의 액운을 막아야 한다고 야단 법석이셨다. 농사일로 바쁜 중에도 시루에 떡을 해서 동네에 돌렸던 기억이 난다. 자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니셨던 할머니의 정성만큼 집안은 늘 정이 넘쳤다. 샤마니즘적인 사고가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오늘날 과학적 사고와 대별되는 풍습을 보며 자랐다.

산업화가 일어나고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할아버지의 똥지게가 사라졌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그저 가족을 위해서 피곤함도 마다 않고 열심히 일만하는 일개미였다.

지금 내 나이가 그때의 할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지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고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에 나는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나라가 되도록 밑바탕이 된 것은 바로 할아버지와 같이 최선을 다해 삶을 개척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문득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머문다.
“세중아, 화단의 작약 꽃이 망울을 터트렸다. 우리 뒷산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자”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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