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지난번에 썼던 남산골샌님 이야기가 솔깃했던지 신문을 읽은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남산골 생원들이나 청계천 광통교 일대의 중인들에 대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는 충고도 들었다. 

서울 광교에서 청계천을 따라 걷거나 남산을 산책하다보니 남산골샌님이나 광교에 살던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왠지 더 궁금해지더란다. 조선시대 중인들은 어떻게 하여 그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으며, 남산골 생원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들이다.
 
흔히 조선시대 ‘중인(中人)’이라 하면, 우리는 보통 계급계층을 염두에 두고 판단한다. 그래서 양반, 중인, 상민(常民), 천인(賤人) 하는 식으로 상중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 중인들 스스로는 ‘한양의 중간지대에 사는 사람들’ 이라는 거주지 개념으로 해석하거나, 사색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청직(淸職)을 이어온 사람들이라 하여 상중하에서의 ‘中’ 이 아니라, 좌중우(左中右) 또는 동중서(東中西)의 ‘가운데를 걸어온(中路之踐) 사람들’ 로 자부했다.

이는 조선 말기 중인들의 위세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와 함께 망국의 책임이 당쟁에 기인한다는 비판에서 자신들은 떳떳하다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통역, 무역, 의사, 법무사(律士), 회계사(算士) 등 그들의 가업은 돈과 직결되었던 까닭에 나라는 어려워도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을 통한 개화에도 적극적이었다. 독점적 위치를 점한 까닭에 신기술을 익혀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인들은 그들의 직업 덕분에 ‘친일파’ 라는 잣대에서도 자유롭다.

한편, 남사(南社)에 소속된 남산골 생원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알다시피 이희승의 수필에서 딸깍발이들은 개화에 반대한다. 그들은 양반이었고, 유교적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같은 양반이지만 북사(北社)의 노론은 친일파가 많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기 친일의 90%는 노론 출신’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각각의 출신지와도 연관이 있다. 남산의 생원들은 대과나 벼슬을 위해 지방에서 상경한 양반들이 많았고, 북촌의 벌열(閥閱)층은 대대로 한양에서 살았던 관료들이다. 청백리를 강요해온 조선에서 관료들은 지방의 토지 보유가 변변치 못했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며 토지 신고제를 채택하는 바람에 지방의 지주들은 부를 유지하였고, 자손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노론 관료들은 관직을 잃게 되면 기반이 사라진다. 일제치하에서도 관직에 매달리니 그들은 관료였고 친일파다.

개화에 반대한 남사(南社) 소속 생원들은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건창 이건승 형제는 강화도로 내려갔고, 홍승헌은 진천, 김택영은 개성, 매천 황현은 구례로 돌아갔다. 한양 출신으로 집이 어찌나 가난한지 사흘에 한 번 불을 때어 밥을 지어먹었다는 하정 여규형은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적극적 친일에 가담한 사람도 있다. 무정 정만조가 그렇다. 그와 어울렸던 대부분의 인물들은 개화에 극렬히 반대했다. 황매천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때 자결로 생을 마감했고, 매천의 동생 황원(黃援) 역시 해방을 맞지 못한 채 자결했다.

이건승과 홍승헌 그리고 정원하도 자결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정만조와 절친한 사이로 사돈까지 맺은 이건창은 개화 반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망국에 앞서 46세에 요절했다.

조선이 망하기 전 정만조는 남사(南社)의 경험을 토대로 12년간 진도 일대 유배지에서 시사(詩社)를 만들어 수많은 제자들을 키웠다. 허백련과 허건도 정만조의 제자였다. 무정은 그들과 우국충정의 시를 나누고 가르쳤다. 도대체 정만조는 죽어서 그들을 어찌 볼 요량이었을까. 하긴 이광수도 나라가 망했을 때는 중국 어느 외진 여관에서 홍명희와 한 이불을 덮고 배를 곯으며 절치부심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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