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극도의 감동에 휩싸여 잠시 정신적 충동이나 분열 증상을 일으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소설 <적과 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성당에서 어떤 작품(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설이 있음)을 감상한 후, 성당을 나오던 중 감동의 물결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전신에 힘이 빠지는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용어는 비교적 근래인 1979년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그라지엘라 마게리니가 명명했다.

마게리니는 피렌체 여행객들 중 비슷한 증세로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에 실려오는 환자 100여명 이상의 사례를 임상 연구하여 얻은 결과에 스탕달의 이름을 붙여 용어를 만들었다. 실제로 스탕달은 현상을 겪고 한 달이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증상은 미술작품 감상에서만 일어나는 경험이 아닌 것 같다.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듣고 황홀경에 석 달 동안 식사하는 것과 잠자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비슷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또 내 경험에 의하면 극도로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경치(景致)를 대했을 때도 이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난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동안 온 산천을 쏘다니며 놀다가 그만 옻중독이 걸리고 말았다. 여기저기 옻이 올라 발진이 나고 가려움을 참지 못해 긁어 진물이 났다. 바르는 약으로는 감당키 어려워 오리나무 열매를 삶은 물에 목욕을 하기도 하고, 유황물로 찜질을 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증세는 이듬해 3월 하순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 온정면 한실 마을에 용한 옻물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하면 옻중독이 낫는다고 했고,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실을 찾았다.

온정면 덕인리를 거쳐 설바우재를 넘어 이십 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 한실에 도착했다. 마을을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에 현기증이 나서 몹시 어지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조금재와 설바우재 사이, 맑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냇가 마을은 그때 한창 피어나는 살구꽃으로 온통 연분홍으로 물들어있었는데, 군데군데 느티나무 고목에는 연녹색 새순이 올라 살구꽃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색조를 이루고 있었다.

내 경험 상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는 항상 슬픔이 동반된다. 나는 그때 나병환자 한하운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이란 시를 떠올리며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걷는 한하운 시인에 가도 가도 검은 산길을 걷는 피부병 환자인 나를 대입시키던 철딱서니 중딩이었다. 갑작스런 슬픔의 습격에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그날 이후 영험한 한실 옻물 덕분에 피부염은 깨끗이 사라졌지만, 대신 한동안 사춘기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로 스물이 훨씬 넘도록 봄꽃에 휩싸인 계곡을 걷는 꿈을 자주 꾸었다. 막연히 그리워져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다행히 20대 중반에 차가 생겨 일찍부터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었다. 꿈에서 본 장소를 찾는 건 쉬웠다. 전국 전통 사찰 입구가 대부분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산 자락은 그 자체가 꿈이었다.

그곳 주민들에게는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지리산에 산수유축제가 생긴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은 정말 컸다. 만발한 봄꽃길을 걷다보면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나오는데, 벚꽃은 달뜬 탄성이 터져 나온다. 때문에 벚꽃은 축제에 어울리는 꽃이다. 술기운이 살짝 돌아 볼이 붉어지듯 흥취가 나는 꽃이다.

그러나 산수유는 코로 스며든 슬픔 때문에 목구멍이 좁아져 “하아”하고 숨이 길어진다. 때문에 사색의 꽃길이다. 자동차가 미어터지고 거지복장의 품바가 뚱땅거리고 꼬치구이 연기로 자욱해져서는 안 되는 봄꽃길이다.

산수유축제가 생기고부터는 날짜를 피해 가끔 다녀오곤 했는데, 재작년에도 한 달 전에 숙소를 예약해 두고 찾아갔더니 주최 측에서 축제를 갑자기 1주일 당기는 바람에 겹치고 말았다. 뒤늦게 축제임을 알아차리고 차를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모처럼 엉엉 울고 싶어 아주 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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