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읍 호월리 출신의 장대룡 장군은 민족의 자존심이다. 청 황제를 죽이겠다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민족의 울분을 대신한 혁혁한 공적의 역사적 인물이다.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 꿇어 앉아 항복하고, 수많은 물자와 여자들을 조공당하는 굴욕의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장대룡 장군은 단신으로 청나라에 잠입, 황제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역주한 중국정사 조선조 4편에 장대룡 장군은 ‘순치(順治) 2년(1645년, 인조23년) 5월, “임경업의 별장(別將) 장대룡(張大龍)이란 자가 궁중에 잠입하여 폭역(暴逆)을 감행하다 체포되어 육시(戮屍)로 벌하고 조선에 이를 힐책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9년 울진군은 울진읍 호월리 마을앞 제월정(霽月亭)에 장대룡 장군 사적비와 조형물 설치했다. 그런데 설치 이후 얼마나 돌보지 않았는지, 그 장군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조형물 일부가 완전히 훼손됐다.
민족 자존심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2001년 편찬한『울진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장대룡 장군에 대한 기록

 

장대룡 장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호월리 무월동에서 출생하였다. 장대룡 장군은 조선시대 1618년(광해군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 및 삼척척사와 경흥방어사를 지냈다.

1636년 병조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 아래 삼도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하고 세자와 삼학사를 볼모로 청나라로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대룡 장군은 불영사에서 수도 중인 힘센 승려 개남(介南)과 의논하여 청나라 태종을 암살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고 결심하고, 개남과 함께 말을 몰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잠입하였다.

청 왕실의 궁 안을 살펴본 후에 궁중 화약고를 발견하고 이곳을 폭파하기로 결심하였다. 장대룡 장군은 자신의 의관을 벗어 타고 간 말의 등에 얹은 다음, 승려 개남을 말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장대룡 장군은 어둠을 틈타 궁중 화약고를 폭파시켰지만, 자신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해 화약과 함께 불타버렸다.

개남은 장대룡 장군의 의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장군이 입었던 의관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 사리곡 동쪽 왼쪽 기슭 산에 의관장(衣冠葬)으로 매장하였다. 묘를 의관장할 때 마을 부근의 각 고을 수령들이 모여 치상을 하고 장사를 끝내자, 용마가 슬피 울다가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장군의 묘 북쪽에 말을 묻었는데, 이 무덤은 ‘의로운 말 무덤’이라고 전하였다. 그 후 승려 개남도 죽자 장군의 무덤 아래 쪽에 묻고 무덤을 ‘개남총’이라고 불렀다. 요즈음도 불교 신자들이 다녀가곤 한다.

                              /남제동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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