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명 룡 집필위원


 

종교인은 아니지만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가끔 잊어도 괜찮다. 대신 태양과 물에 기도하는 것은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지금 이 계절과 너무 잘 어울리는 말인데, 주역 계사전의 天地之大德 曰, “生”이 눈앞에 펼쳐지니 태양과 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계절이 길러낸 온갖 먹거리들로 가득한 5월 밥상을 앞에 두면 신(神)이든 자연이든 어디에라도 기도드리고 싶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사람들로 뒤섞인 서울 변두리에서 오래 살다보니 묘한 재주 하나가 생겼는데, 50대 이상의 사람들 얼굴 형태만으로도 대강의 출신지역을 구별해내는 잔재주가 그것이다. 아내는 확률 50%도 안 되는 내 주역점괘는 그만 때려치우고 그 기술(?)이나 한번 살려보라며 신기해한다.

사실 내게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각자의 어릴 때 주로 먹는 음식에 따라 얼굴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에,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누구나 짐작 가능한 일이다. 물류나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1970년대 이전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식재료만을 주로 섭취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지역 특유의 얼굴 모양을 유지하게 마련이다.

또 어릴 적 식습관의 대부분은 평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얼굴형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고향 음식이란 그처럼 그 사람의 인생역정과 함께한다.

대대로 경기도 안양이 고향이라 얼굴이 기다란 아내는 동해안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해안에서 나는 젓갈은 아예 냄새도 맡지 못한다. 어쩌다 울진에서 젓갈 음식을 보내오면 아내와 나는 밥을 따로 먹을 정도다. 상차림도 내 스스로 해야 하고 먹고 나서는 곧바로 집안을 환기하고 양치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서해안 새우젓이나 조개젓은 매일같이 밥상에 올라온다. 아내가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생선 중에 신기하게도 간고등어는 곧잘 먹는데, 요즘 시중에서 판매되는 그냥 간고등어가 아니라, 굽거나 조렸을 때 소금물이 줄줄 배어나오는 짜디짠 고등어만 좋아한다. 유년의 식습관 탓일 것이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간고등어는 원래 그랬다.

중학교 시절 남자 음악선생님은 유별나게 클래식 음악만 고집하셨는데, 고전음악과 유행가를 비교하면서 항상 이어지는 비유의 예가 있었다. “클래식이 싱싱한 생선이라면 유행가는 소금에 쩐 생선이다. 유행가를 좋아하는 것은 산골촌뜨기가 만날 소금에 쩐 생선만 먹어서 진짜 생선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비교의 적절성과 상관없이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마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선생은 진짜 간고등어를 먹어 봤나?” 모내기철 점심 때, 감나무 잎사귀로 싸서 지푸라기로 묶은 진짜 간고등어 한 토막을 드셔보셨더라면 아마 얘기는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화전농사가 아직 금지되지 않았을 때, 동네 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영양 북싯골로 가져
가서 씨감자며 씨옥수수로 바꾸어 오곤 했다. 들리는 소문으로 영양 북싯골은 한 여름 하늘에 해가 보이면 아이들이 저게 뭐냐고 어른들에게 물었단다. 그만큼 우거진 산골이란 소리다. 아버지들 바지게에 실린 생선에는 소금이 눈 내린 듯 했다. 아내가 어렸을 때 먹었던 간고등어도 그랬을 것이다.

장가를 들고 처가 식구들과 밥을 먹는데 살짝 데친 두릅을 날 고추장에 찍어 먹는 나를 보고 장모는 되게 신기하게 바라봤다. 돌아가서 친정식구들한테 사위 흉을 봤단다. 그랬더니 사촌 언니 왈, “가난해서 양념 해먹는 습관이 안 돼 있었던 거 아니냐?” “그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다는데?” “에이 그럴 수 있어. 어렸을 때 가난하면 양념 맛을 모를 수 있어” 그 이모, 어릴 적 우리 집이 참깨를 가마니로 수확했다는 걸 곧이 안 믿는다. 그래서 고향 음식은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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