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6.25 66주년 특집 (1) ... 義勇인사 李在東(李相億)지사 편

 

폭격과 교전 중 감방문 열어 탈출시켜

화염에 휩싸인 경찰서 유치장 도끼로 부숴

이 지사 사망 때 추모행렬 십오리에 뻗쳐


 

● 82명을 살린 의로운 용기... 6.25 당시 의로운 한 사람의 용기로 죽음의 문턱에 선 82명의 울진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을 기해 기습 남침한 북한 공산군들은 순식간에 부산 일대를 제외한 전국을 점령했다.

인민군들은 평소 공산주의를 반대하던 을진의 우익인사들을 처형하기 위해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같은 해 9.28 서울 수복 직전 울진에도 물밀듯이 국군이 반격해 들어오고, 연합군의 전투기의 집중 폭격으로 퇴각하기에 바빴다.

인민군들이 도망하면서 방화한 것인지, 국군의 폭격으로 발화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목조건물이었던 울진경찰서 유치장(교화장)에 갇힌 사람들은 화염에 휩싸여 모두 타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퇴각하던 인민군들도 사방의 산속에 숨어 기관총으로 사격을 해왔기 때문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왕래할 수 없는 전시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동(李在東) 지사는 화염에 휩싸인 울진경찰서 교화장(유치장)에 뛰어 들어가 도끼로 6개 유치장의 창살을 마구 부수고, 안에 갇힌 82명의 인사들을 탈출시켰다. 6.25 66주년을 맞으면서 이재동지사의 의용을 소개한다.



●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애국 인사들... 그때가 1950년 9월 27일 오후 4시경이었다. 당시 교화장 안에 갇힌 인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82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반공청년단원, 전. 현직경찰 17명, 국군 첩보대원 2명, 매화면 고초령 청년 8명 등이다.

이분들의 신원에 대하여는 여러 지역에서 붙잡혀 왔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지난 1999년 9월 10일자 울진신문에 게재된 명단과 본고 집필 과정에서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추가로 밝혀진 몇 분뿐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인사들은 이재동씨의 4촌 동생인 울진 청년단장 이재하씨를 비롯해 후에 국회의원을 지낸 진기배씨, 매화면 청년단장 장문백씨, 전 경찰서장인 김진규씨, 전 군수 김수근씨, 경찰서 과장 정종화씨, 전 면장 장상진씨, 경찰관 임병식씨, 하당 청년단장 전용덕(전두만)씨, 두천리 청년단장 정봉구씨 ,두천리 청년단 총무 최완식씨. 국민회 회장을 지낸 정림리 남부년씨. 정림리 주인숙씨, 그리고 갈면리 고초령 김곤하씨 외 7명 등이다.

그리고 사동항을 통해 상륙했다가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들어 온 국군 선발대 2명도 있었는데, 심한 고문으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 이재동씨는 누구인가? ... 본관은 경주이며 본래 ‘이재동(李在東)으로 불렀으나 나중에 ‘이상억(李相億)으로 개명했기 때문에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이재동’ 이라고 해야 쉽게 알아듣는다.


그는 울진읍 읍내리 75번지에서 1913년 9월27일 이우근. 전순보씨 사이에 3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59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하세하였다.

그는 6.25 직후 나라 전체가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는 듯한 상황 속에서 좌익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도 그는 좌익에 편승하지 않은 애국지사였다.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며 살아왔기 때문에 좌익인사들도 그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이재동씨의 가문은 애국 활동을 하던 집안으로 그의 동생인 ‘재선(在璇)’씨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들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사망 후에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조카도 6.25 참전용사로 총상을 입었다.

이재동씨는 당시 울진경찰서 앞 시내에서 '근화여관'을 경영하면서 공산당들이 잡아들인 우익인사 중에 자신의 사촌 동생 ‘재하’씨도 포함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38살의 피끓는 청년으로 반공인사들의 떼죽음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50년 9월 27일 공산군들이 도망치기에 급급하여 우왕 좌왕하는 틈을 타 교화장 안으로 잠입하여 창살을 부수려했으나, 술이 너무 취한 상태였다. 유치장 안에 갇혀있던 정종화씨가「술이 깨거든 다시오라!」고 권유하였다 한다.

이때가 당일 오전쯤으로 짐작된다. 그는 오후 4시경 술이 조금 깬 상태에서 다시 경찰서로 뛰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는 이미 경찰서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상황의 증언자들...

○이재동씨의 아들인 이부형(67세/ LA거주) 씨는 이웃의 개똥이 할머니에게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갑자기 나한테 뛰어와서, '할머니 도끼 어딨어요?‘ 하는데, ’ 도꾸? 저기있네‘ 하면서 재동이를 보니, 눈이 흰자위가 완전히 빨갛게 되어 있어 깜짝 놀랬네!」

이부형씨는 또 이렇게 말을 잇는다.「아버님은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는데, 이것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거지요, 100여명 되는 사람들이 타죽을 지경이고요 사촌 동생까지도 그 속에 있었는데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당시에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우리 아버님은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봅니다. 아버님은 제가 9살 때 쯤 돌아가셔서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커서 물어보니, 울진 어른들도 모두 칭송했고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추모 행열이 얼마나 많았는지 십오리에 뻗쳤고, 만장이 월변다리 전체에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재동씨의 용기로 살아난 사촌동생 이재하씨는 나중에 울진농협장까지 지내신 분으로 그의 부인 손양순 할머니는 금년에 9순인데도 옛날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재동씨는요, 나한테는 시숙이 되니더만, 울진군 인물이시더. 울진군을 늘 안고 살았니더, 언변도 너무 좋았고요. 그 사람이 아니모, 그 많은 사람들이 다 타죽었니더. 우리 남편이(이재하) 유치장에 갇혀서 이제 다 죽었구나 이러는데 어디서 큰 소리가 나는데, ‘재하야 빨리 나오너라‘ 하는 고함소리가 나서 보니까 재동형님이 도꾸로 막 창살을 찍더라고 했니더. 우리 시숙이 시루떡을 좋아했니더. 그래서 내가 디딜방아를 찧어가지고 떡을 맨들어 주기도 했지요」


○당시 이재동씨의 용맹담은 울진사람들에게 큰 자랑꺼리로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는 지역 유지 전응수 씨(79세)는 이렇게 전한다.

「그때 상황은 공중에서 연합군 전투기가 도망치는 인민군들을 소탕하기 위해 폭격을 계속하던 시기였지요, 그때 연합군 전투기는 얼마나 빠른지 일명 ’쌕쌕이‘라고 불렀지요. 공중에서 총알이 비오듯이 쏟아지니 어디에서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치장에 갇힌 사람을 살리려고 도끼를 찾아 들고 도로를 건너뛰어서 달려간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지요. 남 살릴려고 자기 목숨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 분은 진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 한 사람 때문에 1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살아났으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

그래서 그때 모든 울진읍민들이 그를 크게 존경했고요.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고 고맙게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고 울진의 남봉열씨의 부친도 그때 갇혔다 살아났다고 들었습니다.」


 

○울진읍에서 강원 이발관을 경영하는 김연국씨(65세)는 울진의 토박이로 마을 어른들에게 이재동씨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본고의 조사에 가장 많은 제보를 해 준분이다.

그는「이재동씨는 당시 울진읍내 근화여관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그의 부친 이우근씨가 금융조합 일을 보셨는데, 울진에서는 재력가였다고 합니다.

이재동씨는 평소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성품도 원만해서 대인관계가 무척 좋은 분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분의 형제들이나 사촌들이 모두 독립운동도 하고 6.25참전용사도 있고, 하여간 나라를 위해 일하던 애국집안이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 당시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붙잡혀 들어간 정종화씨는 근남면 출신으로 공비토벌대 일선 지휘관으로 차출되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분이다. 교회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잠시도 쉬지 못하고 며칠 만에 바로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분은 그 위급한 전투 현장에서도 일기형식의 기록을 남겼다. 이분의 기록에 교화장 창살을 부순 주인공과 일자, 시간까지 기록되어 있어 울진의 역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셈이다.

 

정종화씨의 친동생인 정재화씨는 친형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었다.「우리 형 정종화씨는 일생동안 경찰에 투신했는데, 국가관이 아주 투철한 분이었지요, 술도 잘하는 편이고 성격이 호방해서 친화력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키도 크고 말도 잘 했지요. 경찰에 근무해도 주로 좌익편에 섰던 사람들을 타일러서 다시 의식이 바뀌도록 노력하는 업무를 했어요. 실제로 우익으로 전향시켜 결혼까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울진경찰서 교화소에 감금되어 있을 때 읍내에 사는 이재동씨가 공산군들이 달아나기 바빠 경비가 조금 허술한 틈을 타 창살을 부순다고 왔었는데 술이 너무 취해 있어서, ‘ 나가서 술을 좀 깨워서 정신차리고 오라!’고 내보냈대요. 그리고 실지 창을 부순 것은 술이 깬 후 다시 와서 창을 부쉈다고 들었습니다.」


◆정종화씨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9월27일 16시경 울진면 읍내리 거주 이상억 동지가 뛰어 들어와 교화장의 문을 파괴한다. 감방내에 있던 우리 동지들은 한꺼번에 뛰어나오니, 시내는 화염의 뜨거운 기운이 호흡을 방해함을 느꼈다.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쏘는 인민군들의 기관총 소리에 놀라서 우리들은 갈 바를 모른다.

각자 분산하여 정신없이 고성리를 지나 명도리 산고지에 가서 밤을 새우고 나니, 아군이 울진에 들어왔다는 소식이다. (중략) -하나님도 무심치 않아 승리의 날이 왔구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를 약속하는구나! 하고 혼자 반가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 당시 감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정림리 남부년씨의 장남 남기열(80세)씨는 이렇게 말한다.「그때 용감한 청년이 아니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뻔 했지요. 정림마을에서는 저의 부친과 주인숙씨도 함께 있다가 살아나왔습니다. 저의 부친은 해방되기 전부터 국민회라는 조직에 가담해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셨고요, 6.25 때는 반공 활동을 했지요.

그래서 반대파들에게 몰매를 맞아 큰 고생을 한 적도 있습니다. 평소 저희 부친은 통이 컸어요, 한마디로 포용력이 큰 분이였습니다. 남들이 모두 큰 그릇이라고 평을 했습니다.」




 

◆1999년 9월10일자 울진신문 기사

○2001년 편찬된 울진군지 하권 인물편에는 ‘이재동(李在東)씨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보명(譜名)은 상억(相億)이며, 경주인 거명(居明)의 후손이다. 근우(根雨)의 아들로 1913년 5월27일에 읍내리에서 출생하니 ,성품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어 정의심이 투철하였다.

그는 근화여관을 경영할 때,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 울진군 전역이 북한에게 빼앗기고 국군 선발대가 북진할 때, 양군의 교전 중 울진경찰서 감옥에 잡혀있던 지방인사 진기배(후 국회의원), 김수근(전 군수). 김진규(전 경찰서장). 장문백(청년단장). 정종화(경찰간부). 장상진(면장). 이재하(청년단장). 등 총 82명을 도끼로 영창 창문을 파괴하여 탈옥시켜 많은 인명을 구하여 명망이 높았다. 1960년 1월 28일 시년(時年) 53세로 세상을 떠나니, 향리에서 추모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본 원고 작성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부형씨 (68세 미국LA거주). 이문형씨(64세 강릉거주). 손양선 할머니(90세 읍남리 거주) 전응수씨(75세 산포리 거주) 정재화씨 (83세 매화리 거주) 김연국씨 (65세 읍내리 거주). 남기열 씨 (80세 정람리 거주) 남종열씨 (읍내리 거주)
조언을 주시고 보고 들은 대로 증언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시 울진경찰서 교화장에 갇혀 고생하셨던 우익인사는 82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수치는 아니며 더구나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 혹 당시 목숨을 건진 분들의 명단을 아시는 분은 울진신문사로 제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보전화 054-783-8600 )

 ◆6.25이후 울진경찰서에서 발간한 ‘영광의 서곡’을 찾습니다. 이 책에는 울진이 겪은 6.25 당시의 기록이 실려 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이 책을 소장하거나, 제보해 주신 분께는 후사하겠습니다... 울진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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