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진의 6.25 66주년 특집 (2)... 義勇人士 田斗萬 義士 編

 

혼자서 전투벌여 마을 지켜낸 전두만의 전설


기지와 담력으로 십여명 공비물리친 무공 세워


 

○ 6.25 한국전쟁 당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한 기지를 발휘하여 공비들의 공격으로부터 두천 마을을 지켜낸, 대한청년단 두천리 단장 전두만(호적명 전용덕)의 공적을 6.25 한국전쟁 제66주년을 맞으며 다시금 상기해 본다.

해방이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세력들 간에 일어났던 치열한 이념 대립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반공활동을 하면서 마을을 지켜온 청년으로 6.25 당시 인민군들이 득세할 때 우익인사로 분류되어 잡혀가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두만 단장이 마을을 지켰던 당시는 6.25 전쟁이 끝난 시점이었다. 퇴각하던 일부 인민군들은 북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 살았다. 그들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납치·살상하고 양식이나 가축들을 빼앗아갔다.

청년단 단장으로, 수시로 마을을 습격하는 이들 공비들을 막아내는 역할에 앞장서 마을을 지켜냈다. 젊은 청년들은 모두 국군 방위대로 소집되고, 몇 명 남지 않은 청년들이 지역을 방어할 수 밖에 없어 마을의 어른들이나 어린 소년들까지 힘을 합해 마을을 지켰다.

평소 애국심과 애향심이 강하고 성격도 활달한 편이었다. 한 번은 혼자서 기지와 담력으로 전투를 벌려 마을 지켜낸 전설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반공활동을 하면서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긴 일도 있었지만, 꾸준히 마을을 지키는데 선봉적인 역할을 해 왔다.
                                       
                                                                  - 글쓴이 주


 


◆ 전두만 의사의 구사일생 ...

전두만 단장은 지난호 6.25 66주년 특집 제1편에 소개됐던 이재동(이상억) 의사의 6개의 경찰서 유치장 문을 도끼로 부숴 탈출해 살아난 82명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15일 UN연합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UN군과 국군이 북진을 거듭하게 되자, 인민군들은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울진에서도 근남 수산강을 사이에 두고 북진하는 국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인민군들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결국 국군이 수산강을 건너 울진시내로 향해 진격하고, 연합군 비행기는 도망치는 인민군들을 향해 맹렬한 폭격을 가했다. 울진시가지는 포격과 사격으로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곳곳이 화염에 휩싸였고, 화약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인민군들은「급해서 너희들을 죽이지 못하고 간다」라는 분에 못 이겨하는 말을 남기며 황급히 도망쳤고, 전 단장은 화염에 휩싸인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화소사 할 위기에 있었다. 이때 느닷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 유치장문을 부순 이재동 의사의 의용으로 생명을 구했다.


◆전두만 단장의 기지로 마을을 지키다...

9.28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들은 급하게 북으로 후퇴했지만, 일부 퇴로가 막힌 인민군 패잔병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었다. 이들은 수 년 동안을 산속에 숨어 살면서 밤이 되면 산골마을로 내려와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상하였다.

마을을 급습한 공비들은 양식뿐 아니라 닭이나 염소, 돼지 등 가축까지도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갔고, 심지어 소를 끌고 가거나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잡아먹기도 했다. 수시로 이런 약탈을 당하게 되니 산골 마을 사람들은 항상 불안에 떨었다.

정부에서는 경찰조직으로 치안을 담당하긴 했지만, 경찰병력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을마다 청년단을 조직, 자체 경비를 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국군방위대에 소집되고 마을을 지키는 젊은이들이 몇 명 안 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소년들까지도 순찰에 가담했다.

따라서 자체 방위를 하던 인원들은 무기를 소지한 반공청년단원과 나이가 어려서 관청에 소속되지 않은 자체 순찰조 등 두 종류였다. 마을 자체 순찰조들은 두 개의 초소에서 망을 보는 정도의 역할을 했고 무기를 소지한 반공청년단원은 초소를 순회하며 순찰조들을 격려하고 확인하였다.

두천리 김상중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가 그때 15~6세 때인데, 마을 순찰조들은 나이가 어려서 관청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무기도 없이 그냥 적의 동태만 살피는 역할을 했지요. 그런 사람들을 총 지휘하고 통솔한 사람이 전두만 단장입니다.」

순찰조들은 비무장으로 순찰조를 짜서 순번대로 길목을 지켰는데, 두천마을은 초소가 두 군데 있었다. 무기는 반공 청년단 소속 단원 3명만 소지했다. 전두만 단장만이 M1 소총을 휴대하고, 강용철, 정봉래 등 2명 단원은 땅콩총을 소지하였다.

이들은 경비초소에서 시간에 맞춰 보초를 서는데, 초소라야 돌을 대충 쌓고 이슬이나 피할 수 있도록 거적을 덮은 정도였다. 총기를 소지한 반공청년단원들은 밤만되면 계속 마을 주변과 초소를 순찰하면서 보초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1953년 4월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밤이 꽤나 늦은 시각, 전두만 단장은 정봉래, 강영철과 함께 두천리 마을 안쪽에 있는 초소 쪽에서 하천 건너편의 바릿재 입구 십이령 쪽에서 마을을 향해 내려오는 공비들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공비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십여명도 넘는 인원으로, 마을 앞의 냇물을 건너오기 직전이었다. 고작 3명의 단원들로서는 정면 대결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나마 함께 함께했던 강용철, 정봉래 두 단원은 어둠속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 단장은 초소 앞에 있는 넙적한 바위를 방패로 삼고 큰 소리로 호령하였다.

「1분대는 바릿재 앞으로! 2분대는 우측으로 돌아라! 3분대는 좌측으로 돌아가 즉시 공격하라!」라고 큰 소리로 명령하면서, M1총으로 공비들을 향해 좌우로 사격을 시작하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전 단장 1인의 기지와 전투로 공비들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전 단장은 혼자서 많은 병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 전술을 써서 두천마을 전체를 위험에서 구했다. 그러나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둔 이날 밤 전투에서는 3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가 났다.

순찰조로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김용중 (金龍重 당시17-8세)씨와 사병길씨 2명이 총상을 입어 울진 방면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장성칠씨의 부인이 갓난 애기를 업고 있었는데, 인민군의 총격으로 아기가 즉사하고 부인도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

최삼석씨와 김상중씨의 증언에 의하면, 울진에도 산중 여러곳에 패잔병 공비들이 숨어 지낸 아지트가 있었다고 한다.

「울진읍 대흥리 계전동 깊은 계곡의 속칭 ‘아치골’에 공비들의 은거지가 있었고, 두천 부근에도 두 군데나 있었습니다. 십이령 가는 길에 ‘신시골’ 하고 ‘궁구나무골’ 두 군데 공비들이 숨어 살았어요. 궁구나무골에는 큰 바위가 있어서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바위는 굴같이 생겨서 비도 안새고 희한해요」

십이령 가는길에 숨어 살던 공비들이 밤이되면 두천마을로 내려와서 갖은 횡포를 부리는데 그날도 흐린 밤이었다고 한다. 두천마을의 최삼석(79세)씨는 전두만 단장이 혼자서 마을을 구한 전투를 이렇게 회고 한다.

「저는 그때 열 서너살 때라서 순찰조에는 못들어 갔지요. 그렇지만 순찰조들이 최완식씨 집 봉놋방에서 한잠씩 자고 보초 보러 가고 그랬어요. 나는 그때 봉놋방에서 먹고 자고 했기 때문에 교대 시간이되면, 순찰조들을 깨워 보내고 했지요. 그래서 내가 그 때 상황을 잘 알지요. 그날 저녁에도 달빛이 우중충했는데, 나는 자다가 총소리에 깼어요.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깨보니, 사람들이 모두 방안의 횟대 밑에 납작 업드려 있었지요 」

최삼석씨는 잠을 자다 총소리에 놀라 깨어나서 교전 현장을 목격했다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했다.

「말도마소 그날 저녁에 전두만 단장이 바위 뒤에서 호령하면서 총을 쏘는데, 공비들도 따발 총을 막 쏴서 동네 사람들은 그저 방에 들어가 납작 엎드려있고, 어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도망치려했지만, 나무 울타리를 넘지못해 총에 맞았니더.

울타리가 없으모 도망가기가 쉽는데, 나무 울타리를 쳐 놔서 마당에 어정대다가 총을 맞았어요. 김용상씨는 총을 맞고 방에 옮겨 누웠는데 피로 범벅이 되있었니더. 그때가 4월달이시더 호밀이 시퍼랬지요. 김용상씨는 농삿일을 하고 마침 옷을 갈아입고 근무하러 나왔는데, 흰색 광목천이라 잘 띄었겠지요」 」

「두천 사람들은 저녁때만 되면 무시로를 둘러메고 하당쪽으로 피난 갔습니다. 하당쪽은 공비들이 안 나타나고 우리 마을은 산골이다 보니 수시로 습격을 당했어요. 전두만 단장이 지휘하던 날 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세명이나 죽었지요. 그 중 김용중씨는 바로 제 형님입니다. 총에 맞아 읍내에 채 못가서 절명했어요. 우리 형님 이름은 읍내리 월송대 충혼탑에 기록 되어있습니다」


◆전두만은 누구인가?

전두만 단장은 1924년 8.27일, 울진군 북면 두천리 무정골에서 태어났다. 관명은 ‘전용덕’. 족보명은 ‘전태풍’ 으로 불리운다. 그는 42세의 아까운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2남 5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이 현 울진신문 발행인 전병식씨다.

그는 6.25한국전쟁 이전부터 대한청년단에 소속되어 마을을 지켜냈다. 그의 아들인 전병식 (58세) 발행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두만 단장은 평소 좌익세력들에게 상당한 표적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 단장은 인민군의 치하에서 야간에만 이동하며 숨어 지내다가 어느날 밤 십이령 샛재 부근에서 독사에 물려 쓰러졌다고 한다.

마침 소광리 대광천 마을에 살고 있던 김달수 라는 주민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쓰러진 전 단장을 발견하고, 산꼭대기 안일왕 산성까지 업어서 옮겨주었다. 당시 안일왕 산성 내에는 김진태라는 한 농가가 살고 있어 한 달 가량 숨어 지냈는데, 낮에는 산 속에 숨고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후일 두천2리 마을 길을 내면서 전 단장의 묘가 훼손되어 이장하게 되었는데, 전 단장의 출신마을인 두천1리의 당시 심동섭 이장은 마을을 구했던 전 단장 묘 이장을 돕자는 방송을 했고, 몇 분이 나와서 함께 했다고 한다.

○ 울진군지 기록
의용인사 전두만 단장에 대하여 울진군지(2001년판)하권 인물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보명(譜名)은 태풍(泰豊)이며 담양인. 봉예공(奉禮公)진(晉)의 후손이다. 재성(在成)의 아들로 1924년 8월17일 본군 두천리에서 출생하니 천품이 활달하면서 마음가짐이 순후하며 매사에 성실하고, 일찍 학문을 닦아 26세때 동네 청년단장으로 추대되어 하당 청년회 대표로 왕래하면서 산중지역에서 주민을 돕다가 경찰서에 강검되어 읍내리 이재동(李在東) 탈옥기도의 도움으로 출옥후 동네인명을 구제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전심하다가 1962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니 인근주민들이 덕과 공을 기리고 있다」

○ 내가 본 전두만
두천리 김상정(金祥重)씨(1938년생)는 전두만 단장에 대해 또렷이 기억한다.
「전두만 단장은요 참 미남이었지요. 뱃장도 있고 간담도 크고요. 성격도 활달하고요 한마디로 멋진 남자였지요. 그 사람이 우리 동네를 위해서 큰 공적을 세운 것은 틀림없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요. 6.25가 끝나고 공비들도 거의 없어질 무렵이었지요.

1954년 하반기 쯤인데 그날도 마을 젊은 순찰조들이 산에 모여서 순찰하고 저녁때 하산을 하는데 전용식이란 분이 땔감을 조금해 가지고 갈 량으로 뒤에 처졌답니다. 이때 공비들이 두천마을의 김순각 노인집에서 소를 빼앗아 김 노인을 보고 소를 몰고 가게 했는데, 마침 땔감하던 전용식씨를 만나 소를 대신 끌고가라고 데려갔대요.

그 후로 전용식씨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나중에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용식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두만 단장과 강영철은 마을 젊은이들을 몇 명 데리고 사체 확인을 나섰답니다. 그래서 시체를 확인하고 운반해서 장사를 치러 주었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런 일에 잘 안 나서잖아요. 간담이 크니까 그런 일에 앞장 선 거지요」

당시 순찰조와 함께 봉로방에서 교전상황을 지켜보았다는 최삼석씨(1939년생)는 이렇게 말한다.

「전두만 단장이 참 잘 생겼니더. 키도 크고 활동을 많이 했지요. 모든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많이 했고요 인기가 좋았지요. 그래서 사변 끝나고 지방 자치제가 시행되었을 때 군의원인가 출마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깝게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돌아 갔어요」

울진읍에서 평생 이발관을 경영하는 김연국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릴때부터 마을 어른들에게서 전두만 단장의 용맹담을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두천지역 어른들은 마을에 이런 훌륭한 인사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6.25가 끝나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전두만 공덕비를 세우자고 움직임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15년전 당시 신정 군수님 시절 공적비 건립문제가 상당히 진척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두만씨와 함께 활동하던 두천 청년단원 명단
최삼석(崔三錫 78세 두천리 거주)씨는 당시 전두만 단장과 함께 두천리 방면에서 청년활동을 하던 인사들을 아래와 같이 증언해 주었다.

「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을 다 하지는 못하지마는 당시 청년단으로 무기를 들고 활동했던 사람은 단장 전두만. 강영철. 정봉래 이런 사람들이었고요. 주병창씨가 총무를 했어요.

그리고 김춘만. 심동진. 전만수. 심동일. 장순봉. 사만득. 황해일씨가 순찰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순찰하던 조가 잠을 자고 대기하던 집이 최완식씨 집인데, 이집 주인 최완식도 청년단 단원이었지요.

6.25 당시 우리민족은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와 혼란을 겪었다.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고, 어제의 친한 이웃이 원수로 변하는 소용돌이를 겪었다, 특히 산골에 살던 촌민들은 퇴로가 막혀 후퇴하지 못하고 깊은 산속에 숨어살던 공비들의 공격으로 인해 엄청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산골마을인 두천리 마을도 마찬가지로 수시로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양식과 가축, 심지어 인명이 살상되기도 하였다. 이때 담대한 용기로 공비들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킨 분이 전두만 단장이다. 지나간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막상 다달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6.25가 지난지 6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마을에서는 그의 공적이 회자되고 있다.(2016.6)


 

*글쓰는데 도움을 주신분- -김상중(金祥重)1938년생/ 북면 두천리 십이령길 2300번지/ -최삼석(崔三錫):1939년생/북면두천리 십이령길 2295번지/-전병식 :1958년생 /울진신문 발행인/-김연국 :1953년생 /울진읍 향교로20 강원이발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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