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6.25 66주년 특집 (Ⅲ) ... 울진경찰서 정종화 경위 편

 

수많은 공비토벌 공적 국가유공자 추인받아


좌경 부역자들 선처, 지역민들 존경과 칭송


 

▣ 목숨을 조국에 맡겼던 경찰관

정종화씨는 6.25 한국전쟁 당시 울진경찰서 경찰관으로서 일선 공비토벌대 지휘관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반공청년단원이나 경찰출신, 공무원. 교원, 종교인 등 우익인사들을 잡아들였을 때, 공비토벌 현장에서 붙잡혀 감금되었다.

인민군들은 남침 불과 석달만에 부산을 제외한 전국토를 점령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인민군들은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말미암아 전세가 역전됐다. 울진에서도 수산강을 끼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울진 시가지는 포격과 총성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국군이 진격하면서 연합군 전투기들의 맹렬한 폭격과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인민군들의 기관총 사격으로 울진경찰서 건물도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황급히 쫓겨 가면서 미처 처형하지 못했던 82명의 우익인사들이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화소사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읍내리 이재동(이상억)씨가 갑자기 도끼를 들고 뛰어 들어와 유치장 창살을 부수어 전원이 무사히 탈출했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사람 중에 정종화 경위도 있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났지만, 경찰관으로서 곧바로 공비 소탕작전 현장에 투입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우리가 오늘날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 그 밑바탕에는 목숨걸고 조국을 지켜낸 그의 공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66주년을 맞아 6.25를 전후해, 그가 겪은 전쟁담과 경찰관으로서의 애국정신을 그의 일기를 통해 다시한번 상기해 본다.
 

▣정종화는 누구인가?

정종화씨는 울진군 근남면 출신이다, 호적상으로는 1924년 5월2일생이나, 실지는 1923년생이며 1986년 64세를 일기로 하세하였다.

그는 1945년 경찰에 투신하여 강원경찰국 산하 울진경찰서에 근무하였으며, 6.25한국 전쟁당시 울진군 원남면의 오산지서 주임, 온정 지서주임, 광회지서 주임, 매화지서주임 등 여러 지역의 치안 책임자를 했다.


그는 6.25때 수 없이 많은 작전에 참여하여 큰 전공을 세운 바 있으며, 그가 퇴직할 즈음인 1960년도에는 울진경찰서 정보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평소 투철한 국가관과 반공정신을 갖고 있었고, 성품 또한 호방하면서도 포용력이 돋보였다.

8.15 해방이후 우리민족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우익세력과 공산주의를 획책하는 좌익세력들 간의 이념대립으로 엄청난 사회적 혼란기를 겪었다.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고 정답던 이웃이 원수가 되는 비극적인 시대였다.

정종화 경관은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좌 편향된 지역 출신들을「잠깐의 잘못된 판단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벌칙보다는 설득으로 그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주력했다. 6.25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그가 설득한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표했음이 이 일을 입증한다.

그의 정신은 오직 민주주의를 지키고 지역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굶주림과 지침을 이겨냈다. 언제, 어디에서 적이 나타날 런 지 모르는 위험천만의 현장을 앞장서서 찾아나서는 대한민국의 모범 경찰, 그가 바로 정종화였다.


▣6.25 전쟁과 그의 활약

그는 6.25를 전후하여 최일선 방위책임자로서 인민군의 격퇴와 공비 소탕에 한목숨 던진 용감한 경찰이었다. 그는 6.25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남파된 공비들의 소탕작전에 참여했다. 전쟁이란 언제나 참혹한 것으로 생(生)과 사(死)가 순간적으로 나뉘는 냉정한 현장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메모 형식으로 일기를 썼다. 이 기록은 한사람의 개인적인 체험담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역사적인 기록이며, 급박하고 처참한 전쟁의 생생한 기록이다. 그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6.25 이후 3개월간 울진에서의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일기 1- 6.25가 발발한 지 한 달이 가까운 7.17일 울진은 이미 인민군들의 손에 넘어간 듯 울진경찰서 지휘본부는 평해지서에 설치되었다.

기성 이북의 경찰병력은 모두 평해지서에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민간인들은 이미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행열이 이어졌고, 울진군내에 자가용 30대 중 경찰 지시에 협력하는 자동차는 10대 뿐 나머지는 가족, 친지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버렸다.

7.19일 평해에서 부대를 재편하고 정종화씨는 소대장으로 임명받아 경사2명, 순경43명 등 45명의 소대원을 인솔하고 온정면 쪽의 경비를 맡았다.

이때부터 인민군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선구리, 내,외선미리, 금천리 백암산, 영양군 입암 등지를 누비면서 인민군들의 통과 예상 길목을 지켰다.

산속에서 노숙은 당연한 것이고, 식량 보급이 원할치 못해 한두끼 굶는 것도 예사였다, 빗발치는 총탄속을 누비며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질 때도 많았다. 굶주림과 추위와 공포감을 오직 자기 스스로 극복해야만 하는 전쟁터. 더구나 소대장으로서 대원들의 생명까지도 책임을 져야하는 막중한 책임감, 참으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인내의 한계점에서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농민으로 가장하여 논바닥에서 김을 매는 시늉도 했고, 인민군들에게 붙잡혔을 때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몇 명 안되는 소대병력으로 몇 백명의 적과 교전하다 중과부적으로 후퇴하기도 했고, 전공을 세워 용기 백배한 적도 많았다.

평소 아끼던 지방 청년들의 변절된 모습을 보고 한탄한 적도 있다. 더구나, 믿었던 지방민에게 오히려 고문을 당할 때는 고문의 고통보다 가슴의 쓰라림이 더욱 컸다. 적에게 붙들려 수없이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그로인해 기절한 것만도 몇 번인가!
‘후퇴와 복귀를 7회나 반복하니, 공포감은 사라지고 전쟁은 마치 장난처럼 느껴졌다.’

◆일기 2 (작전 수행중 인민군들에게 생포되어 울진경찰서 교화장으로 끌려 갔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사건은 울진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소중한 자료이기에 다시한번 정리한다.) -

1950년 8월18일 17시경 금정산에서 지방 청년 3명을 만나 곧 아군이 들어올테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고, 그들이 주는 쌀 5되와 식염 등을 얻어 온정면 내선미리의 아는 집을 찾아 들어갔다. 주인은 매우 반갑게 맞으며 식사까지 제공하였다.

내일 새벽 날이 밝기 전에 통고산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줄 것을 부탁했더니, 모두 준비해 주고 통고산까지 짐을 운반해 주겠노라고 하여 너무나 고마웠다. 온전면 내선미리 독립 가옥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때나 되었는 지 문밖의 인기척에 깨어보니 방 밖으로 4-50명의 인민군들이 포위하고 '정종화 사나이 답게 항복하고 나오라! 반항하면 너희 가족들까지 살려두지 않겠다.’ 라고 고함을 친다. 나는 ’도주할 힘도 의사도 없다, 고이 체포해 가라!‘ 했더니, 4~5명의 청년들이 집총을 하고 일시에 방안으로 들어와 체포하였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양손과 전신을 포박당하고 온정 분주소에 왔다. 분주소장과 부소장은 이북에서 내려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취조하면서 아무 요령도 없이 덮어놓고 때리는 바람에 약 30분간 졸도하여 정신이 잃었다.

다시 온정에서 울진경찰서로 이송되는데 보행으로 왔다. 도중 매화지서에 들러 가위로 긴 머리를 대충 깎았다. 근남의 집에 들려 부모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더니 들어주었다. 나는 동생과 부모님을 뵙고 ‘아무죄도 없으니 간단히 조사받으면 나올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밥을 먹고 나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는 눈물짓는 내 모습을 보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호통을 치셨다

이렇게 하여 울진경찰서 교화장에 갇히게 되었다. 교화장에서 매일 무수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 기절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깨어보면 취조하던 자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있는 것을 보니 아마 주사를 놓아 정신이 들게 했던 것 같았다.

울진경찰서 교화장 안에는 6.25사변 전 청년운동과 국민운동에 열렬하였던 우익인사 80여명이 구금되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심사를 받으면서 엄청난 고통을 당했는데, 나는 5차 심사까지 받으면서 많은 매를 맞았다.
 

단기 4282년(1949년) 내가 광회지서에 있을 때, 우리 대원들이 공비토벌 작전을 해서 공비 6명 사살. 마포5필. 식량1가마니 등 전리품을 노획했다는 당시 서울신문을 그들이 증거로 제시했다.

한국 청년단원들에게 야간 경비(야경)를 서도록 지시한 사실로 인하여 무척 고통을 당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과 하루 2식밖에 주지 않는 배고픔이 또한 사람을 괴롭혔다.

9.16일 그날은 음력 8.15일 추석날이었다. 밤 9시경 갑자기 비상신호 경적이 울리면서 교화장 간수 근무자까지 전원 집합이다. 내무서에는 한 놈의 내무서원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그날 밤 아군이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였으나 콩볶듯하는 포성과 총성뿐이고, 아군경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9.17일 밤 10시경 정치보위부장의 지휘에 의하여 갇혀있던 우익인사 82명 중 22명을 트럭에 태웠다. 그리고 담배(공작) 한 개비씩을 각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교교한 달빛을 맞으며 죽음의 순간이 다가옴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우리를 실은 트럭이 출발하려는 순간, 괴뢰군 영관 후보생이 탄 자동차 한 대가 와서 우리를 싣고 갈 자동차를 자기네들이 써야 한다고 서로 언쟁이 벌어졌다. 이 바람에 우리는 살아서 교화장에 재입감되었다.

9.27일 울진중학교 N선생의 부인이 빗발치는 탄환 속을 뚫고 교화장 안으로 뛰어 들어와 떨리는 목소리로 아군이 상륙했다고 알려주었다. 인민군이 도망치고 있으니 이럴 때 탈옥하라고 권했지만, 교화장의 창살을 파괴할 수 없었다.

감옥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 좌왕하는데, 16시경 울진읍내리 거주 이상억 동지가 뛰어들어와 교화장의 문을 파괴한다. 감방내에 있던 우리 동지들은 한꺼번에 뛰어나오니, 시내는 화염의 뜨거운 기운이 호흡을 방해할 정도였다.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무수히 쏘아대는 인민군의 기관총소리에 놀라서 우리들은 갈 바를 모른다. 각자 분산하여 정신없이 고성리를 지나 명도리 산고지에 가서 밤을 새우고 나니, 아군이 울진에 들어왔다는 소식이다.

정종화씨는 그날의 감격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학수고대하던 기원에 하나님도 무심치 않아 승리의 날이 왔구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를 약속하는 구나! (중략). 온양 일대에는 가가호호 태극기가 휘날리고, 해상에는 흰 돛을 단 고기잡이 배가 바다에 가득하고, 태극기를 높이 꼽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북진하는 자동차. 나도 모르는 뜨거운 눈물이 옷자락을 적신다.

’인민군이 모두 도망가고 울진이 수복된 다음 경찰서로 찾아가니, 3개월 동안 그립던 경우(警友)들이 내 얼굴을 보고 놀라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나의 손만 묵묵히 잡고 ‘종화야 너 살았더냐!’」

▣내가 본 정종화

▶울진읍 장 모씨(91세) 는 정종화씨와 광회지서에 함께 근무하면서 여러 차례 작전 명령을 수행한 적이 있다. 그는 정종화씨와의 강원도 전투에 함께 참여하여 그의 활동사항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는 삼척 경찰서 소속으로 기동대에 배치되었는데, 울진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하던 기동대와 강원도 풍곡쪽에서 합세했지요. 그때 울진 기동대 소속 책임자가 정종화 대장이었어요, 그는 강원도 왕산 전투에 참여하여 공비 7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서 경위로 1계급 특진을 했지요’

정종화 경위는 한마디로 화끈하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체격이 야무지고 몸이 아주 좋았습니다. 키도 큰 편이고 신체가 빵빵한 게 아주 남자답게 생겼어요, 간담도 크고 성격이 급하고 활달했지요. 그래도 부하 직원들에게 잘 했습니다. 경찰서 같은 간부 동료들 중에 제일 인기가 있었지요‘

▶정종화씨의 동생인 정 재화씨(1933년생)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형은 정말 국가관이 투철한 용감한 경찰이었지요. 울진 경찰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을 때, 고문을 당해 몸 상태가 형편 없었는데도 집에서 이틀인가, 삼일인가 쉬고 바로 강원도 전투에 참여했어요, 정말 자기몸 안 돌보고 나라를 위해 일한 모범 경찰이었어요’ 그리고 본래 통이 큰 사람이었어요 좌·우익이 한창 심할 때, 좌익 편에 물들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바른길로 오도록 노력했어요. 그래서 좌익 친구들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정종화씨의 맏아들 정연호씨는 생전의 아버지 상을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평소 저희들에게 제복을 입고 나라를 위한 일에 최일선에 서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제 동생은 법관의 꿈을 버리고 경찰에 투신했지요. 저도 울진지역의 취약지구 방위병 근무 우선입대 혜택에도 불구하고, 최전방 근무를 위해 육군 장교로 지원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모범경찰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도 매우 엄했고요. 그런데 남달리 포용력이 넓었어요, 6.25때 좌익으로 활동했던 지방 사람들을 벌을 주기는커녕, 시대를 잘못 타고났을 뿐이다.’ 하시면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도록 설득을 했어요. 그래서 6.25 끝난후에도 그분들과 자제들이 아버지에게 세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6.25 는 우리민족에게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물질적인 피해도 크려니와 더욱 힘든 것은 동족간, 이웃간의 이념 갈등이다. 정종화씨는 경찰관으로 비록 공비 소탕 현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전쟁후의 후유증을 생각해 잘못된 판단을 한 이웃들에게 잘못을 깨우치고 돌아오도록 설득을 한 분이다. 그래서 사실상 많은 희생을 사전에 막았던 분이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그는 1952년도에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고, 2014년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글쓰는데 도움을 주신분 - 매화면 매화ㅣ리 정재화씨. 정종화씨의 맏아들 정연호씨. 울진읍 장**씨 . 울진읍 강원이발관 김연국씨. 및 다수의 울진 유지분들의 제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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