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희의 창가에 앉아 (16 )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이쪽으로… 더 오셔야 해요. 차가 와요! 앗, 위험해요!” “으, 으으… 으으으..”

불같이 더운 몇 년 전 어느 날이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집 근처 골목으로 들어서던 나는 기겁을 한 채 그 자리에 걸음이 멈추어졌다. 차량 통행과 보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길이었는데, 그 입구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뒤로 벌렁 넘어져 계시는 게 아닌가.

오른손에 든 지팡이는 공중에서 허우적대고, 두 다리도 허공에서 버둥거리면서... 놀란 나는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얼른 지팡이를 받아 쥐며 다급하게 여쭈었다.

“할아버지, 어디가 편찮으세요?” “으, 으으으…” 인적도 거의 없고 차량과 오토바이만 길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좁은 길이어서 한 순간순간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18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에다 체격도 우람하신 할아버지는 말씀을 못하시고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만 연달아 뱉어내셨다. 보아하니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사지가 불편하시고 언어 능력도 어눌해지신 듯했다.
 

해 질 녘부터 매지구름을 거칠게 몰고 다니던 하늘에서 급기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백을 길가 담장 턱에 올려놓고 할아버지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의 체격이 너무 커서 연약한 내 힘으로는 부축 자체가 불가능했다. 마침 지나가던 중국집 배달원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선선히 다가와서 힘을 보태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배달을 핑계 대며 서둘러 가버렸다. 지나가시던 중년의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빗발은 점점 거세져만 가고 할아버지께서는 계속 슬픈 소리를 내시며 뒤척이고 계셨다.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걱정스러움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마침 신사복 차림의 아저씨 한 분이 지나가기에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와 힘을 합해 간신히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울 수는 있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보행이 불편하신 분을 집까지 모셔다드릴 일이 난감했다. 집 위치를 애타게 여쭈자 손가락으로만 위쪽 동네를 가리키셨다.

“집 전화번호를 불러주시겠어요? 가족에게 연락해 드릴게요.” “으… 으으…”(머리를 절레절레) “지금 누구랑 함께 사시나요?” “으…사…우..사우 따따” 가족 얘기를 꺼내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더 굳어지면서 손을 내저으셨다. 그분의 목에 매달려 있는 휴대전화기를 가리키며 사위한테 전화를 해드리겠다고 하자 더 세차게 머리를 저으시는 게 아닌가. “가족들한테 연락하는 게 싫으세요?” “으으으 응”(끄덕끄덕)

조금 후, 가까스로 기운을 차리시자 이번에는 혼자 가시겠다고 우기셨다. 내가 비를 맞으며 옆에서 거드는 게 미안하고 부담스러우신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우 몇 걸음 떼시다가는 자꾸 넘어지셨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함께 부축하던 아저씨도 지쳐서 가버리셨고 어느덧 깜깜해진 골목에 바람이 일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대비였다.

‘아, 그렇지! 파출소에 전화해야겠구나!’ 잠에서 깨어나듯 손뼉을 탁 치며 막 휴대전화기를 꺼내던 순간이었다. 골목 입구를 돌아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경찰차 한 대가 마치 구원의 파랑새처럼 아롱다롱 불빛을 골목 가득 퍼뜨리며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나는 다짜고짜 차 앞으로 달려가며 두 손을 흔들었다.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저희가 할아버지를 댁까지 잘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며 건장한 경찰관 두 분이 할아버지를 조심조심 부축하여 차에 태우셨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게 아니고 정기 순찰 중이라고 하였다. “경찰 아저씨, 할아버지 댁이 저 산 쪽이래요. 고집부리시더라도 절대로 혼자 가시게 하면 안 돼요. 자꾸 넘어지시니까요!” 단단히 다짐을 주며 돌아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었다. 상가 유리창에 비춰 보이는 비에 흠뻑 젖은 내 모습은 생쥐가 동무하자고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한 몰골이었다.

문득문득 할아버지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 며칠 후 산책길에서 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는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무척 힘겹게 걷고 계셨다. 인사를 하며 안부를 여쭙자 나를 뚫어져라, 보시더니 대뜸 잠바 주머니에서 사과 한 개를 꺼내 불쑥 내미시는 게 아닌가? 물감을 칠한 듯 빨갛고 예쁜 사과였다. “이거… 주… 려고… 맨날… 왔어. 저… 번에… 봤어.. 저 아래서” 더듬더듬 겨우 말씀을 이어가셨다. 산책길에 매일 사과를 가지고 나오셔서 나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토록 불편하신 몸으로... 어디서 이렇게 예쁜 사과를 구하셨을까? 해마다 마당의 앵두를 한 움큼씩 따서 내 앞에 불쑥 내밀어 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그 순간 번개처럼 나타났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뜨끈하게 솟아올라 고개를 돌렸었다.

며칠 후, 할아버지의 영정을 앞에 모시고 노제를 올리는 장례행렬과 장의차를 그 길목에서 만났다.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시며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하신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사과 껍질은 햇빛에 바싹 말려 유리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두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큰 걱정을 끼칠까 봐 연락을 꺼리시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 안에 온전히 녹아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해 온 암석의 결정체처럼 단단하게.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이제 지팡이도 없이 허리를 쭉 펴시고 성큼성큼 하늘을 걸어가신다. 향긋한 사과 향만을 내 마음속에 남겨주신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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