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울진 산골짜기에서 자랐던 나는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파도소리가 시끄러워서 밤에 어떻게 잠을 잘까.

내가 살던 산동네에서 학교를 가자면 일단 신작로까지 산길을 걸어내려와서 7번 국도를 따라 우측에 바다를 끼고 3km 남짓 걸어가야 했는데 도중에는 바다와 거의 맞닿을 정도로 인접한 집들도 많았다.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파도소리가 얼마나 성가시고 귀찮을까. 파도가 크게 치는 날은 또 얼마나 무서울까.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그 바닷가 마을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파도소리 때문에 너무나도 편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파도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백색소음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신기했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도 그처럼 편하게 잘 수 있다니. 유난히 잠귀가 예민해서 먼 산 부엉이 우는 소리에도 잠 못 들던 아이였는데. 그 후로 동해 바다는 내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지금은 바다를 포기하고 서울에 사는 현실이 가끔 슬플 때도 있다.

학력고사를 포기했던 열아홉의 겨울에 나는 후포 햇내거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서울에 살던 어느 날 바다가 너무너무 그리워져서 전철과 버스를 타고 인천 월미도에 갔다가 뽕짝거리는 소음과 오염된 바다에 실망해서 곧바로 발길을 돌린 적도 있다. 후포 바다가 그렇게 그리웠다. 그 당시만 해도 울진 바다는 철조망에 갇혀있었는데 그 바다가 왜 그렇게 좋은지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른다. 3단 윤형철조망을 억세게 움켜쥐고 피던 해당화 때문인지 해당화를 닮은 사람들 때문인지.

스무 살, 같은 학원에 강화도에서 온 아이가 있었는데 강화에도 후포라는 데가 있다고 했다. 바다에 솔깃해서 다음날 혼자 강화도를 찾아갔다. 1983년 강화도 가는 길은 신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게 거의 유일한 방법인데, 김포평야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길이 나빠 도로가 좁은 곳은 벼 이삭이 시외버스 차바퀴에 쓸렸을 정도였다. 물어물어 강화도 후포를 갔다 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마저 양도면 버스정류장에서 후포(선수리)까지 약 10리 길은 차편이 없어 걸어서갔다.

지금은 강화의 후포도 관광지로 유명해졌지만 당시는 선착장도 없는 농촌 바닷가였다. 우람한 바위가 건강한 갯벌에 유난스레 우뚝한 또 다른 후포바다였다. 그 후로 바다가 마냥 그리워질 때마다 강화도를 찾아갔고 나중에는 강화도가 너무 친숙해져서 강화도 인물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발표했을 정도였다. 그처럼 내게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다.

SNS를 하지 않아서 모바일 밴드(BAND)가 무엇인지 여태 잘 몰랐다. 지난 번 덕수궁에서 울진사람 40명을 만나던 날, 고향 분들을 버스로 보내고 남은 사람들끼리 저녁을 함께 하는데 황승국 울진신문 서울지사장님이 방법을 알려주어 ‘내사랑 울진’이라는 밴드(BAND)에 가입하게 되었다. 울진 분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가상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밴드 회원이 자그마치 2천명이나 되었다. 놀란 것은 회원 숫자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알찬 내용의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울진신문 지상(紙上)으로나 뵈었던 존경스런 분들도 밴드 안에 계셨고 작품들도 그 안에 다 있었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내사랑 울진’ 밴드 안에는 살아있는 울진바다가 있었다. 울진 분들이 새벽 바다를 밴드에 중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요즘 새벽잠이 없어져버렸다. 뛰어난 실력으로 울진 바다의 아름다운 일출을 올려주시는 분, 파도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리듯 바다를 그대로 담아 주시는 분 모두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덕분에 이제 나는 모바일에서 울진바다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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