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 저런 이야기(60)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혼자 서 있다. 오랜 경륜이 있어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잎을 피우고 지는 나무의 삶을 감상하면서 인생의 경륜을 쌓는다고나 할까. 오늘 아침 까치가 이쪽가지에서 저쪽가지로 옮겨 다니며 분주하게 운다. 그 노래는 하루를 시작하는 행진곡이 된다.

얼마 전 인사동에서 사진전시회가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모두들 식당에 모였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어느 사진작가 교수는 제자를 가리켜 내 새끼들이니 잘 거둘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을 했다. 사진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이다. 사진으로 잔뼈가 굵어 유명세가 붙은 노교수의 얼굴에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자만이 배어있었다. 물론 제자에게 친근감이 있어 한 말이겠지만, 교수의 자리가 남을 가르치기만 하는 자리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선생은 교수니 학자니 하는 직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사람의 삶에서 저절로 존경의 염을 품게 만드는 그런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휘황한 지식과 그럴싸한 말과 글로 관심을 모으는 사람은 많지만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평생 배우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배움과 가르침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면서 가르친다. 배우지 않고 평생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배움은 가르치는 사람을 가르치기도 한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배움과 가르침은 동일 선상에 있다.

참된 교육이란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로부터 배우고,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서 내일 알아야 할 것을 오늘 알게 되는 상호교육이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 제기 식 교육이 우리 정신을 키운다.

진리 앞에 선생이 있을까. 하나의 진리에 학통을 내세워 자신을 구속시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 학통으로 인한 당쟁의 폐해도 적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사람의 생애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완성되는가. 그 무엇을 위해 석양을 바라보고 들개처럼 헐떡이며 달려야 하는가. 평생 학문에 노력을 기우려 일가를 이룬다 해도 얼마나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나는 오늘도 배우면서 살고 있다. 배워야 할 대상이 사방에 널러 있다. 길을 가다가 툭 삐져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배운다는 말이 생각난다. 비바람의 하늘 질서에서 배우고 나무와 야생초의 척박한 자생력에서 배운다. 방향을 알 수 없이 머뭇거리는 구름과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에서도 배운다.

우리는 언제까지 학생이어야 할까. 죽을 때까지는 누구나 학생인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산다는 것은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인생을 창조적으로 꾸려나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소질을 발휘하면서 건전한 생활을 영위한다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서도 학생이란 존칭은 올바른 표현인가. 제사상에 모신 지방에는 평민의 경우 현고학생부군이고 여자는 유인이다. 시대가 바뀐 지금, 신분 질서를 나타내는 것 같은 주자가례의 학생學生과 유인孺人이란 명칭을 지방에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죽음으로 배움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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