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고- 잊혀져가는 ‘새재 주막’ 과 ‘성황당’

 

강씨 2대 부부가 주막 열고 성황당 돌 봐

강다연씨, 새재와 얽힌 추억의 실타래 풀어 놔

 


십이령 길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것은 반세기 전이다. 당시 울진, 북면 쪽에서 춘양, 봉화 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대로가 십이령인데, 중간지점에는 ‘새재 (조령鳥嶺)’ 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다.
‘새재’에는 ‘성황당’이 있어 왕래하던 행인들이 무사안녕을 빌었고, 성황당 아래에는 ‘주막’이 있어서 고단한 나그네가 쉬어갔다. 강씨 일가는 대를 이어 새재주막을 운영하면서 성황당을 보살펴 왔다.
그러다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의 약탈을 견디지 못해 고향인 십이령을 등지고 산을 내려오게 됨에 따라, 새재 주막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십이령 새재주막과 성황당에 대한 묻혀 져 가는 이야기들을 강씨 후손 강다연씨의 증언을 통해 들어보았다.
                                          글. 사진 김성준 울진문화원 부원장
 


 

○ 조령 성황당
북면 흥부에서 시작해서 봉화까지 가는 옛 길에는 열두 고개를 넘는다고 해서 ‘십이령’이라 부른다.

십이령 길은 옛부터 보부상 뿐 아니라, 울진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던 대로(大路)였다. 북면 두천마을에서 바릿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제법 큰 재가 나오는데, 이 재가 새재 즉 ‘조령’ 이다.

새재 고개 마루 바로 너머에 언제부터인가 성황당이 있어서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행장 순행을 기원하였다. 지금의 성황당은 목조 와가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고, 주변도 말끔히 정돈되어 있다.

성황당 내부에 걸린 여러 차례 개수기록은 그 동안의 성황당 변천사를 기록하고 있어 성황당 중건시기와 협찬 내용들을 소상히 말해준다.
 

○ 새재 주막과 강학수씨 부부
‘새재주막’은 지금은 건물이 모두 허물어 져 없어졌고, 구멍 난 가마 솥과 깨진 유리 조각, 그리고 불 맞은 구들돌들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규모로 봐선 꽤나 큰 건물이 있은 듯하다.

이 건물을 처음 짓고 주막을 튼 분이 새재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살든 강학수씨 부부였다.

강학수씨의 몇 대 선조께서 십이령 산골로 입향하여 약초도 캐고 농사를 지으면서 터를 잡았다고 하니, 1800년대 경으로 추정된다.

입향조는 자녀들을 낳고, 그 자녀들은 새재 부근의 골짜기마다 흩어져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조령 성황당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지나는 행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성황당은 주막집 바로 위에 있었기 때문에 주막집에서 관리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강학수씨의 ‘새재 주막’은 십이령을 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고마운 쉼터였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가파른 꼬부랑 산길을 오를라치면 지치지 않는 이가 없다. 지친 이들이 새재 주막에서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봉노에서 눈을 부쳤다.

십이령 구간에는 두천에서부터 새재, 넙재, 꼬치비재 등 마을이 있는 곳 마다 크고 작은 주막들이 여러 채가 있었는데, 새재주막은 장사가 잘 되는 주막으로 소문나 있었다. 두 부부가 열심히 한 탓도 있었지만, 무엇 보다 주인의 너그러운 심덕 때문이었다.

산중이라 땔감은 많아서 굵은 참나무를 잘라 쪼개지도 않고 통째로 서너개만 아궁이에 집어 넣으면, 밤새도록 방안이 뜨끈뜨끈했다. 투숙객들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게 아니라, 방 바닥에 깔고 자는 게 보통이었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뜨끈한 아랫목이 천국이다. 강학수씨 부부는 본래 유순한 산골사람인데다 후덕한 성품이라 남에게 많은 인정을 베풀었다. 그러다 주막의 안주인인 강학수씨의 부인이 먼저 별세하였다. 부인을 잃은 강학수씨는 얼마 후 아들인 강재용씨에게 주막을 물려주고, 아랫마을로 따로 내려와 살았다.
 

○ 아들 강재용씨가 주막을 이어받다.
아들 강재용씨의 젊은 부부가 이어받은 후 더욱 깔끔하게 경영해서 이용하는 손님은 점점 불어나 활기가 넘쳤다.

이들 부부는 바쁜 주막일 중에서도 성황당 관리를 철저했다. 항상 성황당 주변에 풀을 베고 허물어 진 부분을 보수하면서, 촛대랑 술잔도 항상 청결히 관리하였다.

강재용씨 부부는 주막이 번창하여 형편이 좀 나아지자, 평소 산골짜기를 벗어 나 사는 것을 염원했던 터라 ‘새재’ 아래쪽에 있는 ‘빛내’라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강씨는 ‘빛내’ 에다 다시 주막을 열었다.

그러나 장사가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강씨는 ‘새재’ 와 ‘빛내’ 중간에 있는 ‘너삼밭’ 으로도 옮겨 주막을 열었지만, 새재 주막만한 곳이 없었다.

새재 주막을 떠나온 지 1년여 동안 새재 주막에는 ‘종기’ 라는 영감이 주막도 하지 않고 임시 기거하고 있었는 데, 강재용씨가 다시 새재로 돌아와 주막을 열게 되었다.

강씨는 새재를 비운 후에도 성황당 관리는 항상 잊지 않고 했다 한다. 주막을 할 때는 초하루, 보름을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냈으며, 인근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3년에 한번씩 전문 무속인을 불러 성대한 굿을 하기도 했다.

「너삼밭으로 내려오는 쪽에 큰 너래바위가 있어서 보부상들이 그 바위에 모여서 밥을 해먹고 쉬어 갔습니다.” “너삼밭에 내려와 살면서도 3`4월 봄과 햇곡식이 나는 가을에는 성황당에 꼭 제사를 지냈지요.” “제사 음식은 메밀을 넓게 부쳐가지고 그 안에 팥을 찧어서 말아서 만듭니다.” “그리고 방어고기 꼬치하고 떡은 절편을 올렸지요.”」
 

강다연 (62세 울진읍내리 거주)씨의 기억으로는 아버지 강재용씨가 새재 성황당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가졌다고 하였다. 또한 새재의 유래에 대해서도 여러 번 말해 주었다고 했다.

「요새 어떤 사람들이 새재라는 말을 재가 높아서 날아가던 새도 쉬어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합디다만 그게 아닙니다.

새재, 조령(鳥嶺)이라는 말은 산의 형상이 새가 부리를 서로 맞대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아버지가 늘상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새재에는 샘이 두 군데 있어요. 아래쪽 큰 뽕나무 아래 샘은 숫물이고, 위쪽 머위밭 쪽에는 암물이 있었어요. 주막집 사람들은 그 샘물 먹고 살았지요」


○ 새재 주막이 문을 닫다
강재용씨는 비록 산골짜기이긴 하지만 새재가 고향이고 주막도 너무 정이들어 매우 행복한 생활을 이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6.25 한국 전쟁이 터지게 되자, 인민군들이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매일같이 나타나 곡식과 감자 고구마와 같은 양식을 빼앗아 갔고, 심지어 고추장, 간장, 닭 같은 가축도 잡아 가는 통에 사람이 겁에 질려 살 수가 없었다.

부득이 산골짜기에 살던 주민들은 인근 마을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 데, 강재용씨 가족들도 6.25가 터진 후 1년 정도 후에 새재 주막을 버리고 울진 읍내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재 주막은 그때부터 아무도 주막을 하지 않았으며 건물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새재 주막집에는 녹이 슬어 구멍이 난 무쇠 솥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본래 큰 솥은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이고요. 조금 작은 솥은 어머니가 쓰던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며느리(장복희) 에게 물려준 것이지요. 그런데 산골이라 솥이 귀하니까, 엄마가 구멍 난 자리에 나뭇잎을 뜯어 막고 콩가루로 반죽하여 이겨 붙였서 밥을 해 먹었습니다.」
 

○ 성황당 관리
강다연씨에 의하면 본래 조령 성황당이 생긴 시기는 모르겠지만, 본래의 성황당은 돌과 흙을 이겨 쌓아 올려서 벽체를 만들고, 풀로 이엉을 엮어 씌운 움막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성황당을 새재 주막을 하던 조부와 부친이 계속 보수도 하고 관리를 했으며,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아래서 주막을 하시면서 성황당 앞에 풀도 매고 초하루, 보름에는 꼭 제사를 지냈습니다.

가을에는 햇곡으로 메를 지어 올렸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성황당이 많이 허물어져서 아버지가 벽도 바르고 문짝도 판자로 만들어 끈으로 묶어 달고 그랬어요. 그리고 볏집으로 영개를 엮어 덮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성황당 안에 처녀 화상이 있었어요. 머리를 곱게 땋은 처녀의 상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약 20여년 전에 가보니 없어졌어요.」

십이령을 넘나들던 많은 사람들이 성황신에게 무사안녕을 빌면서 소지하고 있던 물건 중에서 조금씩 제단에 놓고 예를 올렸다. 비단 1필씩 놓는 보부상도 있었고 미역, 건어물, 곡물, 옹기 같은 그릇을 놓고 가기도 하였다. 주막집 강재용씨는 이 물건들을 팔아서 성황당을 보수 하기도 하고 양초와 제기를 사는 데 보태기도 했다.

강재용씨 가족들은 울진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매년 조령 성황당을 찾아 관리를 하였는 데, 숲이 우거지고 길이 없어져 매년 갈 때마다 낫이나 톱, 괭이 같은 연장을 지참해서 풀을 치고 길을 만들면서 다녔다고 한다.
「성황당은 본래 흙과 돌로 벽을 만들고 풀로 지붕을 덮었으니, 비바람이 불면 오래 갑니까? 우리 아버지가 보부상들이 놓고 간 물건들을 팔아서 보수하는 데도 보태기도 하고 제기도 사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산 꼭대기라 짚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참나무 껍데기를 벗겨 굴피지붕으로 덮었지요, 그 후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한 2002년 쯤 될 거예요. 어떤 대학교수가 왔어요. 꿈에 ‘조령성황당을 다시 지어라’ 하고 현몽을 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성황당을 그때 나무로 다시 지은 것으로 압니다.」

그때 교수가 성황당을 다시 지을 때, ‘뒤실’ 마을 주민들을 인부로 썼는데 그 중 한 명이 일하면서 ‘이까짓 성황당이 무엇이라고, 무슨 귀신이 있다고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하고 욕을 했다고 한다. 그 인부는 집에 가서 피를 토하고 병이 들었는데 누구에게 물으니, ‘빨리 조령신에게 빌라’고 해서 성황당에 나와 정성껏 빌고 나서야 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 성황당 관리를 못하게 되다.
강씨 일가는 6.25때 새재를 떠나왔지만, 조령 성황당은 계속 관리하여 왔다. 매년 찾아가 풀을 베고 청소도하며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7~8년 전 어느날, 그날도 성황당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우거진 수풀을 길을 쳐가며 새재로 올라가는 데, 안동영림서 직원이라는 사람과 만났다.

영림서 직원은 우리의 입산 목적과 신분을 확인하고는 ‘이제는 성황당에 올 필요 없다, 여기는 국유림 지역이라 국가에서 관리한다’ 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강재용씨 부부는 ‘이 성황당은 옛날부터 우리 가족들이 관리 해 왔고 주막집도 예전에 내가 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돌보지 않다가 국가 땅이라고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라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로 다시 오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구멍 뚫린 무쇠 솥은 강재용씨 부인이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갖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것도 유물이니 두고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냥 두고 하산했다고 한다.

○새재 주막과 성황당 탐방
요즘은 십이령을 탐방하려면 사전에 인터넷으로 신청해야만 가 볼 수 있다. 그것도 신청자가 많을 때는 몇 개월에 한번쯤 얻어내는 것도 힘들다. 산림자원 보호라는 큰 목적에는 동의하지만, 산길을 걷고 싶을 때 자유롭게 가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강재용씨 부부는 지금도 부산에 거주하면서, 가끔은 고향 산천을 찾고 싶고 나이가 더 들기전에 한번이라도 더 선친의 묘소를 찾고 싶다고도 한다.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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