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우리나라에서 유명 시인으로 몇 손안에 드는 안도현 시인이 얼마전 울진을 방문하여 시(詩)의 감상과 창작에 대한 특별강연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연탄재’가 떠올라, 당장 달려가 방청객의 일원이 되고 싶었으나 울진이 너무 멀어 포기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국민 너나없이 안 시인을 떠올리면, 발에 채이던 연탄재를 연상할 것인데, 그 연탄재마저 귀하디귀한 대접을 받던 때가 1970년대 울진 한 구석에서 있었다.

70년대. 그때는 학교에서 뭘 그렇게 만날 해오고 가져오라는 것들이 많았던지, 내 생각에는 세상의 모든 종류들이 ‘학교 제출’ 대상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연탄재도 학교에 제출할 물건에 포함되었으니 말 다했잖은가.

나는 공산품이 없어 쓰레기도 없던 산골짜기에서 나고 자랐다. 믿기 어렵겠지만 내 유년의 몇 장 안 되는 사진 중에는 어머니가 바느질해서 만든 무명저고리를 입고 찡그린 사진도 있다. 그 촌뜨기가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무리한 요구에 부딪힌다.

집에는 무명과 삼베가 천이고 옷감인데 학교에서는 형형색색의 리본들을 달고 오란다. 처음에는 빨강 바탕에 검정글씨로 ‘불조심’을 써서 왼쪽 가슴에 달고 가야한다. 불을 덜 조심해도 될 4월 쯤 되면 녹색 리본에 ‘산림보호’를 달고 다니다가, 노랑 리본에 ‘절약’을 달게 되는데 사이사이 ‘과학의 달’이라든가 ‘호국 보훈의 달’ 또는 ‘근조’ 같은 검정 리본이 달리기도 했다. 무명옷에서 겨우 벗어나 나일론 도꾸리세타가 단벌인데 형형색색 올 고운 리본을 만들 천들이 집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무명천을 리본 모양으로 자르고 물감을 발라 그 위에 글을 쓰면 글씨가 번져 하루 만에 까맣게 동그래져, 불인지 물인지 구별이 안 된다. 나중에 10원짜리 종이 리본 세트가 문구점에 나타나 우리를 구해줄 때까지 리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리본 달기는 애교 수준이었다.

일단 기본적인 청소용구 제출부터 문제다. 각자 교실 바닥을 닦을 걸레 한 장과 유리창 닦이 두 개씩 만들어 간다. 개수가 많지 않은 빗자루와 먼지떨이는 옵션이다. 옵션이란 게 원래 형편 좋은 쪽에서 마련하는 것이지만 공산품은 비싸다고 빗자루는 수수농사를 짓는 산골 애들이 담당했다. 먼지떨이도 산골에 작대기가 많다는 이유로 산골 목록에 들어간다. 그 외에도 잔디 씨, 아카시아 씨앗 등 산골이 부담해야할 ‘학교 제출’은 의외로 많다.

기본이 갖춰지면 다음부터 나라가 혹은 학교가 요구하는 물건들을 가져간다. 내 앞 세대는 쥐꼬리도 학교 제출 품목이었다지만 그건 다행히 면했다. 새마을 운동 초기에는 “화투놀이 몰아내고 우리마을 새마을로” 만들기 위해 화투가 학교 제출 용품에 포함되었다. 교탁에 수북이 화투가 쌓였다.

그 다음에는 고철 모으기가 이어져 토요일이면 교탁에 쇠 부스러기가 잔뜩 널브러졌다. 이런 ‘제출’은 나라의 지시에 의한 것이고, 울진군에서 내린 지시도 있었다. 체육관을 짓는다고 비료포대를 몇 장씩 가져오게 했다. 여기서 아이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울진에 짓는 체육관인데 왜 우리가?” 였다. 그 때만해도 생활권은 5일장을 따라 형성되었는데 울진군은 기성장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었던 것 같다. 남쪽은 1일 기성장, 2일 평해장, 3일 후포장, 4일 병곡장, 5일 영해장으로 순환했다.

남쪽 끝에 살았던 우리는 영해가 울진보다 익숙했던 것이다. 아무튼 비료포대 제출이 끝날 즈음 군부대 요청으로 해안가에 둘러쳐진 철조망에 매달아놓을 깡통 제출이 이어졌다. 두 가지가 동시에 시행되었더라면 비료포대가 많은 산골과 깡통이 많은 바닷가 마을끼리 물물교환도 가능했을 텐데 시차를 두고 공출(?)이 진행되는 바람에 산골 아이들은 바닷가마을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읍내 아이들은 논둑 밭둑을 헤맸다.

드디어 학교에서 연탄재를 제출하라는 명령까지 떨어졌다. 학교에 테니스장을 옮기면서 배수(排水)가 좋은 연탄재를 바닥에 깔았는데 학생들에게 하루 두 장씩 연탄재를 가져오게 했다. 학교 주변 연탄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산골아이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땔감이 나무장작인 산골에 연탄재가 있을 리가 만무, 십리 길을 연탄재 찾아 이집 저집 대문간을 두리번거리며 등교를 했다.

그 귀한 연탄재를 발로 함부로 차다니. 그랬다간 연탄재보다 친구들 발에 먼저 차이는 수가 있었다. 교문에서 선도부 형들이 명단을 펼쳐놓고 연탄재 개수를 체크했다. 깨진 연탄재를 두고 절반이 넘나 안 넘나 따졌다. 점심시간이면 담당 선도부 형이 교실을 돌며 제출이 부진한 학생들을 다그쳤다. 아이들이 붙인 그 형의 별명은 ‘연탄쟁이’였다. 누군가 멀리서 “연탄쟁이 온다아!” 소리를 치면 산골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냅다 도망쳤다. 낄낄거리며 도망쳤다. 아이들도 웃을 그런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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