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63)

 

블래드 호수는 슬로베니아의 눈동자다. 호수는 푸른 언덕에 조용히 앉아 가장 먼 곳에 대한 사랑을 품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쾌청한 날씨였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라방켄 산맥의 석회암이 잔설같이 보이고, 길게 드러누운 산맥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먼 거리임에도 산맥이 가깝게 보이는 것은 그만큼 공기가 깨끗한 탓이다.

슬로베니아는 경상도 크기만 한 작은 나라지만, 유럽의 지붕인 알프스를 갖고 있다. 알프스 산맥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면서 슬로베니아 북서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율리안 알프스다. 블래드 호수에 떠 있는 작은 섬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율리안 알프스의 절벽 위로 블레드 성이 보이는데 그 산뜻한 느낌은 동화책의 마법의 성 그림 같다.

블레드 성에 가려고 호숫가에서 밑바닥이 평평한 플레타나라고 부르는 배를 탔다. 배위에는 햇볕 막을 천막이 쳐져있었고 슬로베니아 전통배라 했다. 한 배에 이십여 명이 탔다. 사람이 한쪽으로 쏠리면 넘어질 것 같아 한쪽에 열 명씩 앉았다.

체격이 건장한 젊은 두형제가 뱃사공이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이었다. 형은 서른한 살인데 레슬링 선수 같아 굳건한 용모였고, 동생은 두 살 아래인 스물아홉으로 부드러운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두 아들은 뱃사공으로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 성실히 일한다는 가이드의 소개가 있었다. 형제들이 노 젖는 배는 경쟁이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살을 헤치며 나아갔다. 나는 뱃사공 가업을 이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조가 유유히 헤엄치고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관광객을 실고 호수를 유람하는 그야말로 낭만적 풍경이었다. 블레드 섬은 그리 크지도 않은 호수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조그만 섬이지만, 이렇게 사소한 섬도 주변의 풍경에 둘러싸이면 특별한 곳이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조화로운 작품, 자연스러운 어울림의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배에서 내려 산책로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언덕이어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숨이 찰 정도다. 그 꼭대기에 블레드성이 있는데, 성위에서 바라보니 알프스 산맥이 내려와 호수를 감싸 안은 듯 펼쳐지고, 푸른 호수와 숲속의 아늑한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중세에 지어진 블레드 성 내부는 예배당과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오래된 희미한 벽화가 내 눈길을 끌었다. 전시된 유물은 불레드 지역에서 발굴된 것들로 지나온 세월만큼 고풍스러운 면이 있었다.

다음은 99개의 돌계단을 걸으면서 15세기에 지어졌다는 승모승천 성당으로 갔다. 성당이 건축되기 이전에는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인 지바의 성지로 여겨졌다고 한다. 성당 안에는 소원의 종이 있었다. 세 번을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여행객은 저마다 종을 울리려고 줄을 서 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나도 아내와 함께 힘껏 줄을 세 번을 당겼다. 신은 우리 마음의 종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고요한 이곳에서는 종종 슬로베니아 전통 결혼식이 열린다고 한다.

블래드 호수 둘레는 7킬로미터쯤 된다는데,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되는 사람이라면 걸어볼만하다. 블래드는 그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계조정선수권 대회를 4차례나 개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호숫가 산자락에는 티토의 옛 별장이 보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곳에서 티토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블레드 호수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며칠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조용히 머물면서 며칠 쉬고 싶은 낭만이 느껴지는 브레드 호수 마을. 경치 좋은 이곳에서도 25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었다. 그들은 푸른 호수와 숲을 감상하며 정말 낭만적으로 살았을까.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