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울진신문이 지난 10월 5일로 창간 26주년을 맞았다.

지금이야 울진에만도 언론매체가 네 군데나 되고, 또 굳이 언론을 통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울진에 관한 소식이나 게시글이 쏟아지는 시대다보니 울진신문의 역할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인터넷이 일반적이지 않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거의 유일한 창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고향을 떠나온 처지에서는 현관에 꽂힌 울진신문이 그 어떤 우편물 보다 반가웠다.

당시 내 직업이 출판사에서 편집을 하는 일이다보니 어떤 인쇄물이든 일단 손에 들면 나도 모르게 내용 보다는 인쇄와 편집 상태를 먼저 살펴보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다.

울진신문을 펼칠 때에도 마찬가지 시선으로 전체를 훑어보곤 했는데 그게 참 불편했다. 당시에도 서울에는 이미 그래픽 편집 전문 매킨토시 컴퓨터가 대중화하여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까지 매킨토시를 다루고 있었다.

컴퓨터로 편집을 하고 외장 하드로 옮겨 충무로 인쇄골목에 넘기기만 하면 곧바로 매끈하게 전지(全紙)로 뽑아져 나왔는데, 울진신문은 사진식자(寫眞植字)로 인화된 듯한 종이 위에 로트링펜으로 선을 그은 흔적과 대지에 칼로 잘라 붙인 자리가 또렷이 드러나 있기도 했다. 같은 편집 일을 하는 입장에서 울진신문 편집부 직원들의 고생이 짜안하게 와 닿았던 게 생각난다.

컴퓨터 출판은커녕 인쇄용 필름이나 인화지 출력 시설조차 제대로 없었을 울진에서 발행된 종이신문, 그러나 울진신문의 내용은 어디에 내놓아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속으로 ‘울진에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계시는구나.’하고 감탄했었다.

특히 칼럼을 집필하는 분들의 글 솜씨가 대단했다. 거침없는 입담으로 ‘말달리듯’ 글을 쓰는 전병식 주필의 칼럼에서는 추상(秋霜)같은 호기가 느껴졌는데, 그런 기상이 있었기에 당시만 해도 오지(奧地)였던 울진에서 감히(?) 신문을 발행할 엄두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리고 언제나 충분한 자료를 바탕으로 현실을 냉철하게 조목조목 짚어내는 솜씨가 일품인 김진문 논설위원의 칼럼은 합리성과 함께 때로는 문학적인 감성까지 느껴졌다. 오랜 기간 전인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으로 재직하며 쌓은 내공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들의 탁월한 칼럼을 읽으면서 내가 울진신문에 글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달포 전, 울진에서도 벽지(僻地) 산골인 나의 고향에서 26년 전 울진신문 창간 주역인 전병식 주필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우연하게 울진신문과 인연을 맺어 가끔 내 글을 실어온 지도 어느새 만 8년이 지났다. 보잘것없는 글재주라 신문사에서 불러주지 않아 몇 년을 통째로 거르기도 했지만 어쨌든 햇수로는 근 10년이 가깝게 알음해온 것이다.

그 사이 머리숱이 휑해진 두 사람이 나이도 잊고 밤늦도록 마셨다. 주필님은 26년 전 창간에서부터 중간에 자금난으로 휴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치적인 기사로 인해 검찰 조사를 받았던 쓰린 기억들을 잔잔하게 회상했다.

참 힘든 시절을 거치며 여기까지 온 과거와 지역신문사가 많아진 만큼 경쟁이 심해져 광고 수주도 어려워진 현실, 그리고 서울과 중앙이 모든 것을 흡수한 마당에 결코 순탄치 않을 지역신문의 미래까지. 그러나 26년 전 ‘정론 직필’의 기치를 내걸고 당당히 걸어온 이 길을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내닫겠노라 다짐하면서 앞으로도 칼럼을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내 글에 걸려있는 “<출향인 칼럼>이라는 사슬을 제거해 주십사, 글 소재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주필님은 내 글에서 고향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나 됐는데 무슨 향수가 묻어날까. 내 짐작으로는 아직 자유롭게 칼럼을 쓸 내공이 부족하니 고향 얘기나 하며 수련을 더 하라는 뜻인 것 같다. 그래요, 26년간 울진 언론을 대표해온 울진신문의 칼럼을 아무나 쓸 수 있나요. 출향인(observer) 입장에서 더 갈고 닦으며 울진신문의 미래를 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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