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주변에서 술꾼이라 자부하는 사람들도 가끔 자작(自酌)과 독작(獨酌)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진정한 술꾼이라면 두 용어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작(自酌)은 술상대가 있음에도 혼자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을 말하고, 독작(獨酌)은 말 그대로 술 상대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요즘 말로 ‘혼술’이다.

물론 독작(獨酌)은 상대가 없어 자작(自酌)할 수밖에 없으니 독작에는 자작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자작(自酌)에는 ‘우체국장 술’이라는 우스갯말도 있다는 것은 진정한 술꾼들도 잘 모른다. 왜 하필 자작이 우체국장님의 술일까.

연말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 동네 단체장님들은 여기저기 초청을 받아 각종 송연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는데, 어떤 단체의 장(長)님인가에 따라 술잔의 순배가 달라진다.

면장님은 우리 동네 대표이니 당연히 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이래저래 사정하고 부탁드릴 일 많은 파출소장님, 아들내미 딸내미가 다니는 학교 교장님도 한 잔이 더 간다.

농자금 대출도 남았으니 농협장님 조합장님께도 술잔이 가는데, 청탁하고 부탁할 일 없는 우체국장님께는 술잔 올리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럴 때 우체국장님은 자작(自酌)을 하시며 “김국장, 한 해 수고 많았네” 하는 거다. 그래서 ‘우체국장 술’이다.

요즘 시중에는 ‘관태기’라는 말이 유행이다. 인터넷 시사상식 사전을 보면, 관태기는 ‘관계’와 ‘권태기’를 합성한 신조어로, 인맥을 관리하고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는 것에 권태를 느끼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관태기 현상이 확산되면서 혼자 연말 연초를 혼자 보내는 사람들을 뜻하는 ‘혼말족’ ‘혼초족’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고 한다. ‘혼밥’ ‘혼술’이란 말은 이미 나온 지 오래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관계에 집착하고 살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달리 충실도가 높은 직장 내 서열 관계에서부터 수많은 사회적 관계망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우체국장님 술과 같은 우스갯소리에도 드러나듯 사회적인 관계에는 대체로 이해(利害)가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관계는 이해관계(利害關係)다. 이해(利害)가 관여된 자리가 마냥 편할 리가 없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자신과 상대의 위치에 따라 모임이 즐거울 수도 있고 피곤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관계 가성비’라는 말도 유행한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 대비 얻는 만족을 따진다는 것이다. 모임도 마찬가지로 참여했을 때 소모되는 에너지에 비해 얻는 즐거움이 적다고 판단되는 자리는 불참한다.

한마디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진다는 얘기다. 바야흐로 이제 관계도에서 윗자리에 계신 분들은 ‘낄끼빠빠’해야 되는 시대다. “낄 데 끼고 빠질 데는 빠져달라”는 말이다. 사실은 아주 옛날에는 그랬다.

흔히 ‘술은 어른들께 배워야 된다’는 말이 있다. 어른들 앞에서는 술을 함부로 마시지 않게 되고 술주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옛날 어른들은 젊은이들과 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을 배울 수도 없었다.

우리가 어른 앞에서 술잔을 받고 고개를 돌려 마시는 것은 원래 아랫사람 술잔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주로 올린 술잔을 어른께서 “자네도 한잔하라”며 잔을 건낼 때, 어른의 술잔에 함부로 입을 갖다 대는 무례를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체통 때문에 과음을 삼갔고 젊은이들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물렸다. 그것이 어른에게 배우는 술이다.

관태기의 시대다. 조병화 시인의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를 떠올려봄직하다. 받아라 따르라 하지 말고 ‘우체국장님 술’을 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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