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스님(이규훈)

 

곧게 뻗은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차창 밖으로 언뜻언뜻 스치는 옛길을 보며 세월의 변화를 따라가기 버거운 초로의 중년… 배움과 출셋길을 쫓아 고향을 떠난 나를 투영시켜 본다.

우리는 고개를 넘는 언덕과 내리막이 있고 강과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돌아가는 자연을 닮은 길, 거기에 의지해서 올망졸망 마을을 이루어 살아왔다.

길을 뜻하는 한자의 道(도)는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방도(方道)를 찾았다’ ‘죽을 길로 접어들었다’ 는 말처럼 사람이든 짐승이든 길을 잃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길을 벗어나면 사고가 나듯, 궤도를 잃어버린 중국 인공위성 톈궁1호는 지난 4월 2일 생명을 다했다. 기계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길은 생명선이다.
혈관이 막히면 살 수 없듯, 그것이 찻길이든 물길이든 간에 길의 변화는 거기에 의지해서 사는 모든 것들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을 절개해서 뚫은 도로에 수많은 짐승들이 치여죽고 태곳적부터 함께해오던 생태계가 단절되듯, 농촌은 마음대로 길을 넘나들지 못하는 들짐승과 같은 신세가 된지 오래다.

대도시로 집중되는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뚫리고 읍면의 시내와 촌락을 돌아가는 외곽도로가 생기면서 한적해진 구도로 옆 주유소와 휴게소가 문을 닫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책에서 배운 역사의 현장을 만나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지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 마다 달라지는 고을의 정취와 누군가에게 들었지만, 너무 오래되어 기억 끄트머리에 겨우 걸려있는 향토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목적지까지 정확히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은 길을 물으면서 덤으로 듣는 각양각색의 사투리를 접할 기회마저 박탈해 버렸다.

우리사회는 도시로 향하는 고속도로의 속도만큼이나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그 대가로 고령화와 양극화라는 치유불능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령화와 양극화는 잘못된 경제성장의 길을 걸어온 결과이다.

과거 주류 정치인들은 컵을 피라미드처럼 층층이 쌓아 놓고 맨 위의 컵에 물을 부으면 넘쳐서 밑에 컵을 채운다. 그런 식으로 차례차례 맨 아래 컵까지 차게 된다는 낙수효과로 경제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실재로는 정치와 결탁한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컵을 무한정으로 키움으로써 아래로 흘러내릴 물이 없었다.

또 하나의 착각은 정치를 잘해서 이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성장의 원인을 보면 기계의 발전으로 생산량이 급속하게 증가했다는 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굴삭기 한 바가지 흙이 동네사람 전체의 삽질보다 더 많은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착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무역규모 세계 10위권의 경제부국이라며 아직도 과거의 길을 지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잘산다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 그래서 “먹고 산다”고 한다. 먹는다는 것은 현재의 나를 살리는 일이고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잇는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이다. 이 원칙은 메마른 사막에서도 동토의 얼음 속에서도 지켜져 왔다.

아이를 낳지 않는 세상! 이것은 제 살기에 급급해서 다음 세대를 포기한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으니 고령화요, 낳아도 키울 형편이 안 되니 양극화가 아닌가!

도시의 화려함과 대기업이 이룩한 부(富)는 고속도로를 타고 도시로 달려가서 기계처럼 일했던 농촌출신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개혁과 혁신의 첫 번째는 농촌과 서민들이 잘 사는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는 소회를 담아 보았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