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딱히 출근시간이 따로 없다보니 8시 반쯤 다소 늦은 시간에 아침을 먹는다. 원래 세 식구지만 아들이 군대에 간 지금은 아내와 단 둘이 식탁에 마주하니 당연히 오붓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밥상에 코를 박고 후닥닥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5분 만에 아침밥을 해치운 다음 뒤통수가 뜨거울 정도로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집을 나온다. 근처 내 사무실에서 30분쯤 딴 짓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아내와 같이 차를 마신다. 이유는 아침드라마 때문이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내는 주방 TV로 아침드라마를 보며 식사준비를 하고 ‘가장 독한’ 연속극이 시작되는 8시 30분에 TV를 보며 밥을 먹는다. 나는 드라마가 질색이다.

우리나라 드라마, 특히 아침연속극은 항상 지고지순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천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아침드라마 여주인공이다. 그래서 출생의 비밀을 품고 밑바닥 생활을 하는 중에도 천사의 본성을 유지하며, 수컷 재벌 천사(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극복하고 친부모 천사를 찾아 행복하게 산다.

물론 그 와중에 복수가 있게 마련인데 악마도 감동하는 천사의 복수가 펼쳐진다. 이런 ‘독한 비평’을 밥 먹다가 중얼거리면 곧바로 날아온다. “쟤는 저런 남자만 나타나는데 나는 어쩌다가 이런 남편을 만나가지고” 쟤는 천사잖아 하면, “나는 안 착해?”

내가 동양철학 특히 유교를 공부했다고 하면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에 대한 질문을 가끔 받는다. 한번은 내가 되물었다. 선생께서는 본성이 착한 것 같습니까, 나쁜 것 같습니까? 한참 생각하더니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내 생각으로 보면 성선설이 맞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도 같소.” 사실 이것이 보편적이 우리 정서인 것 같다. <나, 우리, 우리나라, 내편>은 착하다는 오만불손한 착각. 이 착각은 뿌리도 깊어 고질인 것 같다. 유학(儒學)을 함에도 같은 공자(孔子)의 뿌리에서 나온 순자(荀子)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웃나라들과 달리 오로지 맹자(孟子)만을 받들었다. 그러자니 본성이 착해야만 했다. 심지어 씨(氏)가 착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삼국지>의 조조(曹操)는 악인(惡人)으로 규정되어 조(曹)는 우리나라에서 조(曺)가 되었다. 권선징악 이데올로기가 서사의 판을 통차지하여 대대로 이어와 오늘날 아침드라마까지 연결된다.

<나, 우리, 내편>은 착하다는 착각은 당파싸움에서 극치를 보인다. 조선후기 유명한 ‘인물성동이론쟁’의 시발점은 ‘우리 당’은 본성이 착하고 ‘저쪽 당’은 본성조차 악하다는 주장에서 비롯했다. 이쪽은 인간의 본성이고 저쪽은 짐승의 본성이라는 황당한 착각, 그 억지는 사실상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 얼마든지 허용된다. 여론에 휩쓸려 따라한 나의 행위가 사회나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고 해도 반성은 없다. 왜? “착한 내가 한 행위니까” 착한 우리 편이 한 행위가 어떻게 나쁠 수가 있는가. 피해가 있었을지언정 긍정적인 부분이 없지 않으니 착한 행위였어!

반대로 저쪽 편이 무엇을 하였든 나쁜 꿍꿍이가 있고 파 해쳐서 나온 파편은 가시가 되고 들보가 된다. 나의 반대편에 있는 저놈들은 무조건 나쁜 놈들이라는 착각에 ‘나쁜 짓’을 파 해치니 자기편이 몽땅 걸려들 때도 많다.

‘착하다’라는 말은 영어에는 딱 맞는 단어가 없다. 'good'이라고 번역될 뿐이다. ‘좋다’와 ‘착하다’는 느낌상 많이 다르다. 우리는 어쩌면 ‘자기한테 좋은 것’을 착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善과 惡이 혼재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상대도 나만큼 착하고 나만큼 나쁘다. 어쩌면 내가 훨씬 더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상대도 나처럼 자기가 착하다는 착각에 빠져 그 행위를 시도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자.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착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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