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면 출신 (5) 조두형 부회장, 대양 L&P 대표
죽변 출신 (6) 최승훈 세무사무소장
북면 출신 (7) 주상희 (주)동광뉴텍 대표



재경울진경제인협의회(이하 진경회)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울진출신 기업인, 법조인, 회계사 등으로 구성된 경제인 단체이다. 진경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서 고향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실천하는 단체로, 봄에는 고향 후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울진의 어려운 가정에 연탄을 비롯한 난방 기구를 구입하여 전달하고 있다.

또 전체 회원들이 고향 울진의 어려운 가정을 찾아 직접 연탄을 배달하는 등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울진신문은 진경회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5회에 걸쳐 <진경회> 회원들의 근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 세 번째 순서이다.

                                                               - 임명룡 서울지사장
 




핑계를 찾기보다 방법을 찾는 사람

(5) 조두형 부회장, 대양 L&P 대표

 

60세(1959년생), 울진 북면 덕구1리(송정) 출신이다. 부친 조병태氏와 모친 남금랑 여사의 3남 2녀 중 셋째로 위에 형과 누나,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말 그대로 ‘형제자매’를 고루 갖춘 가운데여서인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성격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부구중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찌감치 돈을 벌기 위해 실업계를 선택하여 포항공고로 진학했다. 포항공고는 나중에 포철공고로 전환되어 전국 명문고로 우뚝 서는데, 당시에도 동창생 여덟 명이 지원하여 겨우 두 명이 합격할 정도로 경쟁률이 상당했다.

도시 고등학교로 간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 시험 전날 어머니께 겨우 말씀을 드려 차비를 탔을 정도로 형편은 어려웠다고 한다. 졸업을 하고 포항제철에 입사를 했는데 당장의 식비마저 마련할 수 없어 한끼 150원짜리 구내식당 식권 한달치를 외상으로 구매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조 대표는 한편으로 그런 부족함이 사람을 단련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 경험이 오히려 단단해지고 내면이 풍성해진 것 같다고 했다.

조두형 진경회 부회장이 대표로 있는 ‘대양 L&P’는 대형, 중량물 도장(塗裝) 전문 업체로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에 위치하고 있다. 직원 6~10명으로 비교적 소규모 업체지만, 반도체 생산기계의 뼈대에 해당하는 구조물 등 부피가 크면서도 정밀함을 요구하는 금속을 도장하고 있다.

전극을 이용하여 미세 분말잉크를 전착하는 기술이 탁월하며, 정밀 분사시스템과 대형 건조로(乾燥爐)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한 특수성을 확보한 덕분에 반도체업계 등 거래처가 비교적 탄탄하여 경기변동에 민감함 없이 매출이 꾸준하다.

사업 규모를 더 늘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조 대표는 “경기는 파도와 같아서 적재적소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모험도 중요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는 말처럼 신중함도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3D업종이라 직원 구하기도 쉽지 않고, 있는 직원들과 최대한 안전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넘치는 주문 물량은 외주로 돌려 소화하면 되니까요.(웃음)”

조 대표는 포항제철에서 8년을 근무하다가 다시 대학에 들어가는 모험을 했다. 대학공부에 미련이 남아 그동안 잘 다니던 포항제철에서 과감히 퇴사한 것이다. 29세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34세, 늦은 나이에 졸업을 한 까닭 대기업을 포기하고 중견 건설업체 회계팀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IMF가 닥쳐 건설업종이 연달아 무너지며 다니던 직장도 문을 닫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금속도장(塗裝) 업체 사장님이 회사가 회계문제로 복잡한 상태이니 당분간 회계업무를 봐달라는 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 회사마저 부도가 나고 대표가 구속이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저야 세무회계 능력이 있으니 갈 데가 많았지만, 제가 잠시나마 사장님으로 모시던 분이 구속된 상태라 그냥 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분이 출소했을 때 다시 복귀할 수 있는 발판만 만들자는 생각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장을 꾸려가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구속된 대표의 출소가 늦어지고 막상 복귀를 했지만 나이도 연로한데 자금을 마련할 형편이 못되는 바람에 조 대표에게 떠맡겨지다시피 넘겨진 것이었다. “2년 동안 집안에 돈 한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다행이 집사람이 작은 어린이집을 꾸려가고 있어서 굶지는 않았지만요.(웃음)”

조 대표의 소신은 ‘일체유심조’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미래가 탄탄하게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선택하는 바람에 고생은 많았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핑계를 찾는 사람보다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고자 했다.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로 느껴졌다고 했다. 나름대로 방법을 찾았을 뿐이고 그 방법에 설령 잘못이 있더라도 핑계로 머무는 것보다는 옳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진실을 최우선으로 삼아 기업을 이끌고, 더불어 나눈다는 생각으로 직원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100대 1일의 경쟁을 뚫고 세무직에

(6) 최승훈 진경회원, 최승훈 세무사무소장

 

1959년생(60세), 죽변면 후정3리 출신으로 부친 최치수氏와 모친 전정림 여사의 3남 2녀 중 둘째아들이다. 죽변초등학교와 죽변중학교를 거쳐 춘천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세무공무원을 지내면서 부천대학교 경영학사, 카톨릭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국세청에서 15년간 근무하였으며, 현재 부천세무서 맞은편에서 최승훈 세무사무소 소장을 맡고 있다.

울진신문 진경회 특집을 통해 만난 분들에게서 새삼 놀랍고 존경스러운 것은 하나같이 자수성가를 했다는 점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주인공들이라는 사실이다. 최승훈 세무사 또한 별도의 특집이 필요할 정도로 사연이 많은 분이다. 개인사에 대한 언급을 꺼려했지만, ‘독자님들의 간곡한 요청’ 이라는 나의 협박(?) 에 못 이겨 굴곡진 인생사를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친이 작고하셨다. 최세무사에게 가난은 일상이었다고 한다. 마흔에 홀로되신 어머니는 5남매를 건사하느라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셨다. 쉰 살에 첫 번째 뇌졸중을 앓게 된다. 곧바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 후로 다섯 차례나 반복되는 바람에 평생 중풍과 씨름하였다. 결국 60대 중반에 쓰러진 뒤로는 89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최세무사는 죽변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 제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춘천제일고는 군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는데, 10%는 성적이 우수한 일반 학생들에게 배당되었다. 학비와 기숙사비가 저렴하고 간간히 장학금을 받았기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으나,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만 18세에 9급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울진 북면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북면 부면장님은 선친(先親)과 죽마고우였다. 그렇게 시작된 첫 번째 공무원 생활을 불과 67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신임 공무원 연수교육을 갔다가 규율위반으로 연수원에서 퇴원했기 때문이다.

외출을 나왔다가 외박을 했다는 이유였다. 별일도 아니었고 연수교육이야 다음차례에 받으면 그만인 것을, 최세무사는 면사무소에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자신을 믿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면장님의 얼굴을 뵐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반년이나 사표가 보류되었지만 끝내 복귀하지 않았다. 험난한 앞날이 닥쳤다.

최세무사는 18세부터 집안의 경제를 떠안아야 했다. 물론 형님과 함께였지만 둘 다 어린 나이에 벌어봤자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변 생선가공 공장생활을 시작하여 어촌에서 하는 돈벌이는 안 해본 일이 없단다. 나중에 공무원과 세무사로 이렇게 성공한 분이 그때는 죽변 일대 공사현장을 따라다니며 시멘트나 모래 질통을 수도 없이 졌다.

현역으로 입대하여 병역을 마친 후에도 공사장 막일이 직업이었고, 어번기(漁繁期) 때 오징어 배를 타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고 한다. 최세무사는 오히려 나에게 ‘대화퇴어장’을 아느냐고 물었다. 들어본 적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더니, 일본 북해도에서부터 독도와 일본 중간수역까지 두세달씩 예사로 머물며 오징어잡이를 했다고 한다. 밝은 웃음에 큰 키는 아니지만, 강단이 예사롭지 않은 최세무사의 당당한 체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그런 생활을 하자니, 주변인들이 걱정할 정도로 술 또한 일상이 되고 있었다.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막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세무사 특유의 강단을 발휘했다. 독하게 매달려 공부를 한 끝에 1983년 서울경기 세무공무원에 100대 1일이 넘는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발령이 늦어져 1985년 국세청에 입사할 때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동료들에 비해 많은 나이였지만 최세무사 특유의 강단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맡은 임무에서 결코 남들에게 뒤져본 적이 없이 16년의 세무공무원 생활을 했다. 중부지방국세청 세무조사관에서 퇴직을 한 후 1년간 휴식을 취하며, 준비한 세무사시험도 어렵잖게 통과하였고 다음해 2002년 세무사를 개업하였다. 세무사를 개업한 후에도 부천세무서 국세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동하였다.

울진 죽변에는 개인택시를 운영하는 형님이 계셔서 수시로 고향을 찾는다고 한다. 중풍을 앓으시던 어머니께서 올해 5월에 작고하셨는데, 병세에 비해서는 그나마 오래 사신 것 같아 고맙기도 하지만 형편이 좋아졌을 때, 마음껏 누리거나 거동 때문에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몹시 안타깝다고 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을 여쭈었더니 죽변중학교 동창들의 모임인 ‘등대회’가 워낙 활성화가 잘 되어있어 즐거운 만남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친구들이 이 글을 보면 “짜식, 그 시절에 누군 고생을 안 했냐.”며 핀잔을 줄까 걱정된다며 웃었다.
 

 




로커, 아파트 및 오피스텔 납품 1위 우뚝

(7) 주상희 진경회원, (주)동광뉴텍 대표

 

1968년생(51세), 북면 나곡1리(석호마을) 출신으로 부친 주진욱氏와 모친 신정희 여사의 3남 1녀 중 장남이다. 양친은 고향 나곡에서 살고 계신다. 주상희 대표는 부구중학교 14회 졸업생이며, 재경부구중학교 동창회를 통해 고향친구들과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주)동광뉴텍의 주요 생산품목은 로커(locker)이다. 연매출 50억 정도의 규모이며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에 본사와 공장 그리고 안양시 만안구에 기술연구소를 갖추고 있다. 자물쇠가 달린 개인사물함을 보통 ‘락카’로 호칭하지만, 공식 외래어표기는 ‘로커’이다.

주대표가 영업이사로 재직했던 (주)동광레저개발이 70년대 중반 일본의 기술을 지원받아 한국에서 제작하면서 국내에 상륙했다. 5년 뒤 자체 기술을 확보하여 지하철 무인물품보관함을 제작, 설치하면서 급성장하였다.

당시에는 자판기 개념의 개인사물함으로, 동전이나 지폐를 넣고 액수에 따라 일정기간 사용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대형할인마트 등에서 설치 운영을 하면서 동전이 회수되는 형식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96년부터 유통시장 개방과 함께 대형할인마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바로 전에 영업사원으로 (주)동광레저개발에 입사를 하면서, 주대표는 로커와 인연을 맺었다. 입사 후 주대표는 자신만의 영업시장을 개척해야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고, 대형 도서관을 타깃으로 영업을 시도했다. 주변에서는 대부분 실패를 예상하고 만류했지만, 영업시작 6개월 후 서울 정독도서관을 시작으로 전국 도서관에서 요청이 쇄도해와 주대표는 사내에서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경쟁업체가 난립하고 있었고, 90년대 말부터 경쟁이 심화되면서 하청업체의 변심도 뒤따랐다. 기업의 핵심기술과 영업기밀이 경쟁사로 누출되었다. 결국 2006년에 (주)동광레저개발은 경쟁업체에게 인수되고 만다. 그러나 인수한 업체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2년 뒤 2008년, 당시 영업이사로 있던 주대표는 퇴사를 결정하였다.

곧바로 안양시 금정동에 (주)동광뉴텍을 설립하면서 독자적인 사업에 들어갔다. 그 후 2013년 조립식 ABS로커 업체를 인수하며 사세를 확장하였고, 이듬해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로 이전하였다. 또한 경기도 안앙시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수요변화에 따른 제품개발에 투자를 하고 있다. 지하철 무인물품보관함으로 시작되었던 로커는 현재 무인 택배함이 주요 품목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아파트를 비롯한 다가구 주택마다 무인 택배함 설치가 일반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스키장을 비롯한 레저시설에도 로커는 필수품목이다. 그동안 열쇠를 이용한 개폐식 잠금장치는 디지털로 바뀌었고 지금은 휴대전화와 연계한 스마트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기존의 일률적이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재료도 금속에서 벗어나 조립형 플라스틱이 사용되기도 한다.

주대표의 (주)동광뉴텍 기술연구소는 기술개발에 앞장 서왔고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전국 아파트 및 오피스텔 납품실적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문량이 많아 확장이 필요하지만 선뜻 투자를 미루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시대가 도래할 때 로커 시장도 한때 블루오션으로 인식되는 바람에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였고, 덤핑에 가까운 가격 인하로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 제조업체가 대부분 안고 있는 문제로 인력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도 걸림돌이다. 주된 노동력인 외국인 근로자들이 근로시간 단축으로 수입이 줄면서 이탈이 우려되기도 한다. 인원을 늘리자니 외국인 고용비율 때문에 실행할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했다.

(주)동광뉴텍은 로커 생산하는 것만 아니라 설치운용까지 하고 있다. 업체로부터 장소를 제공받아 수익의 일부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 스키장이나 해수욕장 또는 엑스포와 같이 한시적인 수요에 적합한 시스템이다. (주)동광뉴텍의 제품을 구입하여 위탁 운용하는 업체도 여러 군데라고 한다.

주대표의 기업운용 모토는 완벽한 제품으로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30년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완벽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언제나 우리 회사의 제품이 최고여야 한다는 사명으로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건장한 체격에 신뢰감이 담뿍한 인상의 주대표를 보면 절로 든든해진다. 고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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