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방검찰청 환경보호협의회 사무국장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경상북도 최북단에 있는 울진(우거질 蔚, 보배 珍). 그 후 약간의 몇 년을 빼고는 지금까지 줄곧 자리잡고 내 삶의 터전이 돼 버린 이곳 울산(우거질 蔚, 뫼 山). 그 두 곳은 지명의 의미로 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울산은 이미 우리나라 산업수도로서 눈부시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그 지명이 주는 의미를 무색케 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이곳에 46년만에 폭설이 찾아왔다. 아파트촌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다. 나 또한 옛날 어릴적 시절로 돌아갔고 추운줄도 모르고 눈속을 마구 뒹굴며 뛰어노는 동네 꼬마녀석이 되어 언덕이 있었던 고향집으로 내닫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푸른솔이 서 있던 그 언덕, 내가 자랐던 집 뒷동산의 하얀 설경이 눈에 아롱거리며 다가왔을 때 눈송이를 내게 던지며 뛰어오는 예쁜 내 딸래미를 확인한 순간 금새 난 지금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홍안소년일 때 그토록 눈부시게 보였던 하이얀 색깔의 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건만, 이미 나는 처자를 거느리고 험한파도 헤치며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중년의 한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 가고 싶다. 그 옛날 풀 먹인 연실에 푸른창공 머~얼리 연날리던 언덕위의 동네꼬마로 돌아가고 싶었다. 떠나야지! 일상도, 지나온 세월도 모두다 훌훌 던져 버리고 이 겨울이 가기전에, 솔가지에 소담스럽게도 쌓여 있는 저눈이 다 없어지기 전에...... 나는 다음날 함께 동네꼬마가 될 지인(知人)들을 만나 밀고 당기며 어렵사리 여행일정을 잡게 되었다.

 

 며칠을 영하권에 맴돌던 추위는 출발당일 우리의 겨울여행을 축복이라도 하듯 영상의 포근한 날씨다. 계획에도 없었던 갑작스런 조찬미팅이 잡히며 출발시간이 늦어져 애를 태웠지만 간신히 출발을 하게 된다.오늘 하루 내게는 가족도, 업무도, 휴대폰도, 공해도 그 아무것도 없다. 진짜 나의 집이 있는 고향으로 간다.백두대간 자락, 천혜의 신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울진으로 간다. 곧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고향길, 동해안 7번국도... 잠시 눈을 감아본다.

 

어머님 그리워

산 첩첩 내고향 천리이건만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 외로이 떤 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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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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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멀리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신사임당의 감정이 아마도 이랬을까? 구구절절 뼛속까지 사무치게 와 닿는다. 어느새 우리일행을 실은 차는 경주를 지나 포항방면으로 신나게 내달리고 창가에 비치는 겨울풍경은 온통 하얀 세상이다.

 그 풍경 밖의 하늘은 청정도 하여 대비가 되니 도심은 이미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모양이다. 청하 보경사 입구를 지나자 드디어 만경창파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고가는 고깃배, 한가로이 노니는 갈매기떼...... 한폭의 그림이다. 내 삶의 현장인 울산, 그 앞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유조선과 화물선의 모습 그것과는 영 딴판이다.

 

 곧바로 장사해수욕장 그리고 삼사해상공원을 지나고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고향친구가 소개해준 후포등대밑, 간판이름 대로 아이의 마음만큼이나 쏙 빼어 닮은 주인아저씨. 향기나는 회맛도 맛이려니와 생선을 듬뿍 넣은 울진고유의 김치. 우리 형제자매가 먹고 자랐고 또 울진사람의 식탁에 대표음식으로 오랜세월 자리 지키지 않았던가? 또 하나, 웃지 못할 일은 주인아저씨의 인심이다. 카드를 내밀었더니 카드기 용지가 떨어졌다고 나중에 들리면 달랜다.

 

 아자씨! 그래 언제 돈벌어 집 살랍니꺼? 예? 얄팍한 내 양식으로는 이 질문 밖에... 말끔하게 닦여진 4차선 국도와 구도로를 오르내리며 북쪽으로 향하던 중 덕신에서 망양정 방향의 해안도로를 택하였다. 가뜩 노한 고래가 입김을 불었거나 뿜은듯한 젖어있는 해변, 기암절벽, 그 틈새에서 모진풍상 다 겪으며 자란 노송이 반기는 풍경은 우리일행을 감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원남과 근남의 경계지점쯤에 다달았을때 오른쪽 앞에 나타난 우뚝 솟은 촛대바위.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웅장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그 비범함 앞에 숙여졌던 고개가 알 수 없는 듯 이리저리 갸우뚱거림은 무슨 이유일까? 모두가 바위양쪽에 걸쳐져 있는 그 무엇에서 시선이 정지되고 말았다. 누구를 위한 철조망이더냐? 이제는 칼집에 쑤셔 넣어 전쟁기념관에라도 보내야할 구시대 유물이 아직도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영욕의 세월 반세기, 그것도 모자라 저렇게 천년바위의 목을 죄고 있더란 말이냐? 솔아! 솔아! 푸른솔아! 말 좀 해다오. 그 존재의 이유를 말이다. 우리일행은 마치 155마일 철책에라도 와 있는 듯 잔뜩 굳은 얼굴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갑자기 차안의 화제는 되새기기도 싫은 30여년전 울진, 삼척 그때 그 사건(?) 이었다. “마 됐다. 그만하입시더” 끝도 없는 논쟁, 우리 세대에 끝을 맺으려나 알 수 없는 슬픈 이야기다. 이만저만 그새 우리는 소나무가 빼곡히 서 있는 오솔길을 걸어 마침내 망양정에 올라 있었다. 확 트인 망망대해...

 

망양정 오른 말이 바다밖은 하늘이나 하늘 밖은 무엇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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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山을 꺽어내어 六合에나리는 듯

五月長天 백설은 무삼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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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화 한가지를 뉘라서 보내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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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풍류가객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한구절이다.

 

 특히나 기성면 망양리에 있었던 이 정자를 당시 군승(郡承)을 지냈던 나의 6대조 鶴자 英자 할아버지께서 현령과 더불어 이곳으로 이건하였다하니 정자 주변의 돌멩이 하나가 그리고 풀 한포기가 나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을 둥근 목재기둥에 손을 가만히 대고 150여년전 살아계셔서 주춧돌 하나하나를 쌓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힘찬 숨결을 들을 수 있었고 푸른 하늘을 한번 그리고 서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태백준령을 휘휘 바라보며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일행은 왕피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불영사로 향했다. 수산교를 건넌다. 성류굴로 소풍가던 초등생때는 끝이 보이질 않던 긴다리였건만 4차선교량이 바로 옆에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작지만 그래도 정감은 훨씬 더 있어 보인다. 저 다리는 우리 울진의 역사이다.

 

 지난시절 울진사람들의 숱한 애환과 슬픔이 깃던 이곳, 역사는 지나간 과거를 더듬어 우리가 살아 있는 혹은 살아야 하는 어떤 내력을 찾는 것이다. 자기 할일 다했다고 뭉개 없애 버리는 과오를 범해선 안된다. 예술과 문화가 있는 차 없는 다리, 꿈의 다리로 새롭게 단장함은 어떨는지? 다리 끝지점 수산솔밭 입구에는 친환경엑스포 준비가 한창 진행중이다.

 

 그래, 개발이 절대 우선되어서는 안된다. 한번 버려진 환경 되돌리는데 100년이라 했던가. 내가 사는 울산만해도 60~7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어 그 한몫을 다했지만 그 이후 버려진 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민과 관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였던가. 아직도 그 상처는 완치되지 않은 채 그 치유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제발 내고향 울진 만큼은 자연에 순응하며 환경과 개발을 조화롭게 하여 이 땅을 자랑스럽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왕피천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맑은 물,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고 졸졸 흐르는 계곡. 문헌에 따르면 행곡 주천대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km구간에 의상대, 창옥벽, 조계등, 부처바위, 거북돌 등의 명소가 있다고 하는데 정작 안내푯말은 하나도 없어 찾을 길이 없었다. 수려한 경관이 이어지더니 왼쪽에 佛影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계곡 가, 좋은 위치에 자리는 잡았으나 조악스럽고 차게만 느껴지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암울했던 80년, 자유와 민주를 되찾으려는 백성들의 함성을 그들은 군화발로 무참히도 짓밟았다.

 이것이 5공화국공법인가? 이땅의 권력자들은 말단 군인들을 동원하여 저들만의 치적쌓기에 급급한 나머지 금형에 찍어낸 듯한 졸작을 여기에 남겼다.

 

여기는 대한민국 금강소나무군락지 1번지! 하루 빨리 그들의 잔재를 없애고 우리의 혼이 담긴 저 소나무로 역사를 바로 세우자. 그것으로 어찌 80년 오월의 상처를 다 씻어낼 수 있으리요마는...... 마침 불영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얗게 눈 덮인 오솔길로 걸어내려 간다. 길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역사를 만든다.

 

 나는 일부러 남이 밟지 않은 눈길을 걸으며 새 역사(?)를 쓰고 싶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찾아온 곳이던가? 심산유곡, 한 기슭에 자리잡은 佛影寺. 그다지 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작은 것도 아닌 소박하게만 느껴지는 절이다. 절 가운데 자그마한 연못에, 저 능선위에 있는 바위의 그림자가 부처 모양으로 비친다 하여 부처 佛, 그림자 影자를 써 불영사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고찰은 온통 눈으로 덮혀 있다.

 

 쭉 뻗은 소나무를 배경으로 편안하게 앉아 있는 고찰의 풍경은 세상살이에 찌들은 나를 한없이 빠져들게 손짓한다. 이토록 혼탁해 버린 자를..... 주변은 우리일행들이 눌러대는 셔터소리가 어지러울 만큼 고요하고 눈바람에 흔들리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겹겹이 쌓인 천축산 능선을 따라 긴 여운을 남기며 흘러간다. 부처님! 님의 세계를 잘은 모르지만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굽어 살피소서.... 절간을 나오다 계곡으로 내려갔다.

 

 앞뒤로는 기암괴석, 흘러가는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손이 시리도록 차갑다. 이 물이 왕피천을 따라 내려가 동해안으로 흘러 갈쯤에는 이 계곡에도 화사한 봄기운이 돌며 나뭇가지의 움도 돋아나겠지. 나그네의 여정은 짧고 갈 길은 멀다. 이제 마지막 방문지인 금강소나무군락지로 발길을 재촉한다. 이곳은 내가 처음이자 평소 꼭 한번 찾고 싶었던 곳이다.

 

 영주방면 36번국도, 서면소재지를 지나자 조금 후에 군락지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소광리 방향의 작은 도로는 눈으로 가득하였고 차는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침 지나던 우체부아저씨, 다음기회에..... 라는 명쾌한 답을 준다.

 

 조선조때에 나무의 심재부분이 누런 황금색을 띤다하여 黃腸木이라 불렀단다. 당시 조정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黃腸禁標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하니 그래, 그 법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냥 돌아가입시더. 우리의 방문은 곧 오염원이 될수 있으니까.

 스스로에게 옹색한 위안을 하며 아쉽지만 발길을 돌린다. 이미 저녁 어스름이 짙게 드리워지고 눈바람에 몸을 움추린다. 당일의 짧은 여정은 끝나고 다시 일상이 있는 남으로 내닫기 시작한다. 우리는 소중한 옛추억에서 너무 멀리 떠나와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돌아가기에 너무 먼길을 지금도 지금도... 멀어지고 있다.

 

‘친환경농업엑스포’ 국제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한다.

휴대폰을 켰다. 메세지가 겹겹이 들어와 있다. 그 모두가 내사랑하는 가족의 것이였다.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나의 일상은 시작되고 있었다.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출신

현 울산지방검찰청 환경보호협의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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