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지난 11월 6일, 아는 사람의 초대로 남산국악당에서 한국의 전통 춤을 관람했다.

2018년 전통부분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된 무용가 임수정 교수의 “무애(無碍)”라는 춤판 공연이었다. 가을밤 남산에서 우리 고유의 춤과 음악 그리고 소리에 빠져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90분 동안 이어진 공연에서 승무(僧舞)를 비롯한 한량무(閑良舞) 등, 여러 가지 우리 춤이 펼쳐졌는데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울산학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TV를 통해서 학춤을 본 적은 있지만 공연에서 보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입체감이 오롯이 살아나니 무용가의 숨결이 내 호흡 같이 느낄 정도로 감정이 이입되었다. 학(鶴)의 우아하고 고고한 춤사위에 선비의 고결한 품격이 깃들어, 부드러우면서도 굳센 절제감이 관객들로 하여금 감동케 했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학(鶴)이 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흔히 ‘황새’라고 불렀지만, 학(鶴)은 황새(鸛)가 아니라 두루미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마룡산 자락 <줄개뜰>이라는 너른 들판에는 두루미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내륙 깊숙한 산 속에 펼쳐진 벌판이라 인적도 드물고, 당시만 해도 농약이나 비료가 없던 시절이라 무논에 새들의 먹이는 풍부했다.

덕분에 두루미 말고도 희귀한 조류들이 많았다. 어른들이 ‘물꿩’이라 부르는 새는 정말로 꿩꿩거리며 울었고, 물닭이며 물까마귀는 심심찮게 푸덕거렸다. 두루미는 유별나게 큰 키와 몸집으로 멀리서 봐도 바로 눈에 띄었다. 두루미를 먼저 발견한 꼬맹이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황새, 내 땀뽀”를 외쳤는데, 지금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아마 일본말인 ‘땀뽀(担保)’를 사용해서 복을 가져다준다는 황새를 먼저 본 사람이 찜해놓는다는 의미로 짐작된다.

한번은 아주 가까이서 두루미를 본 적 있다. 어른들이 논에 들어가서 일을 할 때 아기를 뉘여 재우거나 꼬맹이들이 쉴 수 있게 솔가지로 얼키설키 원두막 같은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햇볕이 들지 않게 출입구도 나뭇가지로 막아두었는데, 자연탐사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위장 캠프와 비슷한 모양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얼핏 잠에서 깼다가 바로 앞에 두루미가 지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서 보니 크기가 엄청났다. 거의 어른 키와 맞먹는 듯했다. “황새 내 땀뽀”를 해야 되는데 무서워서 입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 이후로 학(鶴)을 키우는 게 작은 소원이었다.

옛날에는 학을 키우는 선비들이 많았다. 학 자체를 선금(仙禽) 도는 선학(仙鶴)이라 하여 애중히 여겼고, 학을 키우며 완상하는 것을 취미로 삼은 선비들도 많았다. 선비들의 표상인 학창의(鶴氅衣)도 학의 고결한 외형을 닮고자하는 의미다. 또 귀한 분께 학을 선물로 기증하기도 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소신과 원칙으로 임금에게도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던 조경(趙絅)이란 선비도 학을 애지중지 아꼈던 사람이다.

이교(李矯)와 이지형(李之馨)이 각각 조경에게 학을 한 마리씩 선물했다. 학들이 아침저녁으로 “뚜루룩 뚜루룩” 맑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때를 알리기도 하고, 박자에 맞춰 빙빙 돌며 춤을 추기도 하였으니 얼마나 신통하고 대견했을까.

집안에서 길들여진 학들은 멀리 날아가지도 않고 앞 시냇가나 산 개울로 종일 쏘다니다가도 아침저녁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7월이 지나면서 벼가 익어가니 조경의 아들이 부친께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우리 논에 벼는 아까울 것이 없지만 이웃의 농사에 해를 입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처음 키울 때처럼 한 구석에 우리를 만들어 학을 넣어 두면 학도 사람도 다 이득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집 안뜰에 우리를 만들어 학을 키웠으나 어린 학 한 마리가 죽고 말았다. 조경(趙絅)은 너무나 안타까워 학을 땅에 묻어주고 지은 글이 유명한 ‘예장설(瘞鶴說)’이다. 그 옛날처럼 시골에서 두루미를 흔히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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