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규 세무회계사무소 대표

남에서 북으로 백두대간을 거슬러 오르다 반도의 허리춤에 있는 내고향 울진! 세인들에게는 백암온천, 덕구온천, 성류굴, 불영계곡, 원자력발전소, 월송정, 망양정 등의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에게는 ‘서울’이니, ‘부산’이니 하는 것은 지도위에 쓰여진 지명으로 다가오는데 ‘울진’이라는 소리는 그 자체의 말만으로 가슴저미도록 미어오는 설레임과 흥분으로 감싸지며, 정겨운 어머니 같은 푸근한 호칭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느낌은 어제보다 오늘, 아니 내일에 이를수록 그 감도(感度)가 더 할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곳은 죽변면 방축골로 죽변남방파제에서 남쪽으로 인접한 마을이다. 우리 동네는 천연기념물 아름드리 향나무가 있는 성황당이 있고, 길게 드리워진 해안선을 따라 하얀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낮이나 밤이나 남녀노소가 어울리는 놀이터이며 피안의 쉼터이기도 하지만 오징어철이면 건조덕장으로 만원을 이루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죽변항을 삶의 근거지로 살고 있는 우리네 부모님들은 나라경제가 어려운 60·70년대 그 시절 하나같이 입을거리보다 먹을 양식거리를 걱정하는 생존의 문제가 제일 시급한 시대였다. 그래서 특별히 한 직종에 구분되지 않고, 여느 포구와 다름없이 크던 작던 농사일을 하면서, 오징어철이면 오징어건조에 매달리고, 농사일도 하는 소위 농어업 복합직업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 왔고, 자식을 겨우 학교로 보낼 수 있었다.

 

한때는 명태와 대구를 비롯하여 정어리떼가 몰려들었고, 해방 후에는 꽁치, 오징어 어업으로 번창한 곳이기도 하다. 명태, 대구에 뒤이은 봄꽁치와 여름오징어떼는 울진경제의 큰 몫을 담당한 주요한 어종이기도 하였다.

 

특히, 기름이 오른 봄꽁치는 왕소금을 뿌려 적쇠불에 올려 구어 먹어보면 안먹어 본 사람은 도저히 그 맛을 모르리라. 젓갈로 담군 ‘꽁치간수’는 그 내음새에 눌려 울진사람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기차게 맛있는 양념소스였다. 또한 구수한 횟때기 식해와 대개, 문어, 새우, 소라 등 울진의 사계(四季) 특산품은 출향인 뿐만 아니라 맛을 본 타지인이라도 그 맛을 그리워 하고 있다.

 

화성리를 올라가는 초입, 우리집 뒷산 동산에 올라서 죽변항구를 내려보면, 멀리는 언제나 햇살을 받아 은비늘 반짝이는 망망대해의 바다와 하늘과 맞닿은 듯 가물거리는 수평선, 가까이는 작은 대(竹)밭 가운데 우뚝 솟은 하얀 등대를 중심하여 옹기종기 둘러앉은 마을안은 딱히 누구의 집 마당이라 할 수 없는 한마당 이웃과 사는 고만고만한 초가집들, 항구의 초입으로 길게 늘어진 양쪽 방파제안으로 오목히 들어간 부두사이에 통통선의 고깃배가 가지런히 때로는 어지러히 널려져 있고, 해녀들의 잠수질과 휘파람 숨비소리, 댓마(전마선)에서 잠수경을 이용하여 낫대로 미역채취 모습 등을 담아내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한눈에 보이는 야트만한 죽변포구의 모습은 남해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풍광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하지 않으리라.

 

초등학교시절, 여름낮에는 바쁜 농사일을 도우다가 요리조리 구실을 대고 틈새를 얻어 친구들과 바다에서 물안경도 없이 멱을 감으면서 자맥질로 굴이나 섭조개를 따고 고기를 잡으며 한여름의 따가운 햇빛으로 온몸을 태웠다.

 

물기 적신 온몸에 열탕같이 달궈진 백사장의 모래로 가슴을 감싸 안을 때, 머리에서 두눈으로 내려오는 짠바다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면서 그 사이로 어렴품이 보이는 것들 - 백사장 가장자리에 피어난 나지막한 붉은 해당화 꽃, 백사장위로 오르는 작열하는 태양빛의 아지랭이 열기, 그 뒤 저 멀리 모랭이 굽이 신작로를 따라 털털거리며 오는 속절없는 완행형 시외버스와 그 버스에서 막연히 누가 내릴까 하는 호기심 가득찬 어린 친구의 눈망울 등 - 저녁이면, 모래사장에 나와 한더위를 식히면서 또래 친구와 형들이 모여 모래진을 쌓고 진을 빼앗는 ‘진돌이놀이’에 흠뻑 빠져 놀던 일들, 아련한 그 시절의 고향풍경이 새록새록 영상화된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형은 소먹이 풀을 베는 일을 하는데 반해 나는 들에서 소를 먹이는 일을 하였다. 풀베는 일은 한두 시간이면 족하지만 위험한 낫을 지녀야 하기에 어린 동생은 소를 데리고 산과 들에 나가 해질 무렵까지 있더라도 위험은 덜했기에 어른들의 합리적인 배려였다.

한나절 동안, 매일같이 나는 소와 함께 친한 친구로서 지냈고, 그 큰 두 눈으로 우리는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동그랗고 큰 눈을 뚫어지게 보다보면 그 속에 또 다른 내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둘은 일심의 동체같은 생각이 들면서 어느새 자연동물에 대한 생명의 존귀함을 일찍부터 터득한 소중한 기회를 얻은 지 모르겠다.

 

제 혼자서 풀을 먹고 있는 동안 나는 겹겹이 둘러 싸인 들과 산을 보면서 소중한 자연의 원근(遠近)과 조화를 익혔고, 푸른 하늘에 둥둥 떠가는 하얀구름의 시시 변형을 보면서 끝없는 상상과 막연한 미래를 그려보므로서 사유의 철학을 익혔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 유년시절 당시 힘든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값진 시간이라 자평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자랑은 비싸고 귀한 물건을 그 기준으로 삼았지만, 자아(自我)를 인식한 이즈음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인생의 역정이 그 보다 더 내세울 수 있는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나이들면 아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고향을 떠난지 30여년. 고향을 잊은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죽변중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종합고등학교를 1학년 잠시 등록하였다가 이팔(二八)의 나이부터 서울로 부산으로 여러 곳을 다녔다. 그러나 고향은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고향을 잊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지주(支柱)를 잃게 되는 것이다. 본적은 옮길 수도 있지만, 고향은 옮길려고 해도 옮겨지지 않는 영원한 영혼의 안식처이다.

 

부산에서 대학강의 또는 상공회의소 등 특강이 있는 경우 개인신상에 관한 인생의 경험담이나 삶의 가치에 관한 인생관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울진’출신임을 밝히고 울진대개의 연원, 울진의 관광명소를 자랑스럽게 표현한다.

 

이제는 수강생들 대부분이 울진에 대해서 강원도와 경상도가 접경 지역이며, 울진대개, 관광명소 한 두개 정도로 끄집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전라도 보다 먼 곳에서 왔구나 하는 생경스러운 눈으로 본다.

 

부산은 서부경제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서부경남출신이든지 아니면 전라도출신이 많다 보니 울진과 접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를 다 마친후 수강생들이 강의소감을 표현하면서 부모님, 외갓집 등으로 본인이 울진출신이든지 또는 울진과 관련되어 있다고 나에게 친근감으로 메일을 통해 소식을 보내온다.

 

한국문화는 「정」의 문화라 했던가? 그 친구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은 「정」의 문화에서 인지상정이라 생각하는 나를 잘못되었다고 할 것인가? 정파와 이념으로 정제된 세속의 사회 틀 속에 살면서 감정을 추스릴 때나 힘겨웁고 고독할 때는 난 아늑한 엄마품 같은 ‘고향 울진’을 찾는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고, 반갑게 맞이하는 친구가 있고, 친척이 있기에 항상 반겨주고 상처난 생채기를 치료해 주는 신앙같은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약력 죽변면 출신, 죽변중학교13회/ 자격 : 세무사, 경영학박사/ 강의 : 경성대학교 회계학과 외래교수, 부산상공회의소 세법강사,  부산경상대학 실버대학 강사

 

/ 약력 : 김홍규 세무회계사무소 대표, 재부울진향우회 부회장, 부산세무사회 홍보이사, 한국세무사고시회이사, 한국회계정보학회 재정분과 위원장(04년), 한국회계학회 회원, 흥사단회원, 해운대구청지방세심의위원, 부산 KBS 세무상담(전)

 

/ 논문 : 공동사업과 현물출자의 관련성고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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