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국 (목사, 죽변제일교회)

 

이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다. 그 때의 나는 따뜻한 집 안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고 있었다. 거실에 꾸며진 작은 트리 위에는 온갖 색전구가 재잘거리듯 반짝이고 아래엔 큰 양말도 하나 걸어 놓았다.

결코 산타가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만하면 충분히 낭만적인 크리스마스인 셈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번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오실까?’

엉뚱한 상상이 고민이 되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절대로 우리 집에 오실 리는 없다’ 였다. 이미 그 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곳에 먼저 오시진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마치 이전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20대의 총각은 그의 스케줄을 맘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 질문이 끝나기 전 답은 이미 떠올랐다. 부산역, 사방에서 모인 노숙자들로 늘 북적거리던 부산역 광장의 모습. 만일 예수님이 오신다면 분명 먼저 그 곳으로 가실 것이다.

답을 찾은 나는 마치 예수의 대리자라도 된 것인 양 비장한 마음으로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과일, 컵라면, 손난로.. 밖에서 겨울밤을 나기에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것들을 사서 포장을 했다. 그리고 TV를 보고 있는 남동생을 불러 취지를 설명하곤 동행을 강요했다. 짐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혼자 가기엔 겁도 났으니까. 다행히 흔쾌히 따라와 준 동생과 박스들을 안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여행객도 행인도 사라진 부산역 광장은 여기저기 불을 피워 추위를 녹이려는 노숙자들의 대합실이 되어 있었다. 그분들에게 다가가 준비한 것들을 나누어 드리며 박스가 어느덧 바닥을 보일 때 쯤,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더 받기 위해 강짜를 부리면서 험악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것 말고 돈으로 달라’는 이, 자신을 우습게 본다며 금방이라도 손에 든 술병을 던질 듯 다가오는 이들까지, 나름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우리는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고마해라. 젊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고 이렇게 준비해 온 것만 해도 고맙지. 이게 무슨 행패고” 불을 쬐던 이들 중 나이 지긋해 보이시는 분의 나지막한 한 마디는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동작을 멈추게 했고 분노를 잠재웠다. 나는 얼른 그분에게도 준비해간 봉지와 인사를 건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 이제는 시간이 지나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그의 눈동자. 어쩌면 내 또래의 아들이 있을지 모를 그의 눈동자 속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자녀이거나, 누군가의 배우자, 혹 어쩌면 누군가의 부모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들이 이 차디찬 콘크리트 역전까지 내몰리게 된 그 과정을 나는 얼마만큼 이해하려 했던가. 그 시간 속에 수없이 부딪혔을 온갖 상처와 아픔을 나는 함께 아파할 줄도 모르면서 그저 값싼 동정으로 찾아왔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 말구유를 자신의 침상으로 선택하고, 버려진 이들을 만나러 광야로 향하셨다는데. 내 이름 적힌 십자가 대신 지고 나를 살릴 만큼 나를 사랑하셨다는데, 나는 그 사실을 숱하게 들어 왔음에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 사랑을 값싼 이벤트로 덮으려 했음을 부끄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날 나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옳았다고 확신한다. 예수께서는 그날 그 광장에 오셨다는 것을. 하지만 그 분은 노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기 위해 오셨다. 노숙자들과 함께 불 옆에서 자신의 온기를 나누시면서 어리석은 청년을 향해, 이제까지 그렇게 해 오셨듯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나는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올해도 분명 그분은 나와 당신에게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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