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칼럼 - 초가삼간의 행복 4

 

필자는 우리문화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돌침대에 빗대어 초라한 현주소를 설명한다. ‘초가삼간의 행복’ 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온돌은 우리민족이 개발했고, 현재까지도 인류최고의 난방법으로서 탁자생활과는 비교 될 수 없을 만큼의 지혜가 담겨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탁자문화를 대표하는 침대는 방바닥의 냉기를 차단하기 위해서 잠자리에 발을 달았고, 식탁과 의자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우리문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화’ 또는 ‘근대화’ 라는 단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화, 근대화는 유럽을 세계의 중심에 두거나 중심으로 간주하여 세계 문화 등에서 유럽 또는 유럽인을 최고의 우월성으로 상정하는 유러센트리즘(Euro centrism;서구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의 지리학자 블로트(James Morris Blaut)는 “서구중심주의는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이자 역사에 대한 터널비전-터널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이라 부를 수 있다.

유럽문명, 즉 서구에는 모종의 역사적 우월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문화·환경·마음·정신 등 모든 면에 걸쳐서 뛰어난 속성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서구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로 인해 유럽은 영구적으로 전진·진보·근대화하는 반면, 세계의 여타지역은 천천히 전진하거나 정체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적 정의를 내렸다.

참으로 타당한 지적이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하나같이 최고의 문자라고 칭송하는 멀쩡한 한글과 우리말을 팽겨 치고 ‘뭔가 있어 보인다’는 저급한 미명의 노예근성이 만들어낸 허영심으로 영어일변도의 언어생활을 당연시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국 침대의 변천사는 이 같은 지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침대는 과학” 이라는 어느 가구회사의 광고 문구처럼-물론 그 회사가 전통문화의 입장에서 침대를 새롭게 해석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구가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한국형 침대를 만들어내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는 대중이 상업주의 광고에 속아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부끄러움과 반성이 따를 수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식민지배를 겪으면서 서구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세력과 지식인들을 시작으로 ‘서구를 배우자’는 열기가 일어났고 지배층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서구중심주의가 형성되면서, 어느덧 우리역사와 문화마저 서구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과학적이고 건강에 좋은 온돌을 버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침대를 들여놓는 것을 고급스런 생활이라고 착각하였다. 막상 침대에서 생활해보니 너무 푹신하고 옆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느껴지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매트리스 용수철의 강도를 대폭 높여 푹신함을 줄이고 탄성만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온돌의 따뜻함이 몸에 배여 있는 한국인들은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고 자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만들어 내었다. 여기에 착안하여 그 유명한 돌침대가 탄생된 것이다.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돌침대는 발 달린 온돌에 불과하다.

그간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서글픈 현실에 동의하면서도 서구중심주의에 길들여진 탓에 좌식의 온돌문화를 거부한다. 과연 우리문화를 외면하고 아무런 비판없이 서구를 따르는 것이 신식이고, 고급스럽고, 있어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조상대대로 이어오며 슬기와 지혜를 보태고 담아온 문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남을 따라가는 한심한 모습일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되고 전도된 관점’ 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들의 잘못된 시각에 우리들이 동조해서 만들어낸 슬픈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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